탁월하지 않아도 괜찮아

탁월하지 않아도 괜찮아

[ 목양칼럼 ]

고광진 목사
2020년 11월 27일(금) 08:49
아는 사람도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던 개척 초기에 접근하기에 가장 편한 상대는 학생들이었다. 그들과 친해질 요량으로 컵라면 무료쿠폰을 만들어서 언제든 교회에 오면 컵라면을 끓여 주었었다. 도연이는 그때 만난 친구다. 초등 5학년 말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모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때부터 거의 일 년 정도 매주 장년예배에 나와서 맨 앞줄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조용히 점심식사를 한 뒤 돌아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연이가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영어 좀 가르쳐주세요!" 중학교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응? 뭐라고?" 영어를 누군가에게 가르쳐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중학교 영어 정도야 준비 좀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해보자고 했다. 어렵지 않은 교재로 정하고 일주일에 네 번, 아침 7시에 교회에 모여 1시간 동안 영어 공부를 하고 등교하기로 했다. 기왕 하는 거 두 명을 더 모아서 시작했다. 7~8개월 정도 꾸준히 하자 책 한 권을 끝낼 수 있었다. 도연이는 인근 도시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현재 교회와는 멀어졌다.

하지만 도연이 아버지는 매해 추수 때가 되면 쌀 40kg을 가지고 교회로 찾아오신다. 벌써 3년째다. 도연이 아버지는 신앙생활을 한 적도 없으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분 어머니께서는 개인 사찰을 가지고 있을 만큼 불심이 깊은 집안이라고 들었다. 한번은 도연이 아버지가 지난 얘기를 꺼내셨다. 도연이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영어를 봐주신 것은 잊지 못할 은혜라고 하시면서 다른 건 몰라도 해마다 쌀은 한 포대씩 드리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지금껏 지키고 계신 것이다. 사실 내가 영어전문강사도 아니고, 도연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얼마나 되었겠나 싶지만, 아버지 눈엔 이른 아침부터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집을 나서는 아들이 대견했을 것이고, 그 아들의 공부를 무료로 봐주는 목사가 남달라 보였던 것 같다.

요즘 들어 "내가 지금 교회는 안 나가지만 혹시 나가게 된다면 정산푸른볕교회를 나가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지난 추수감사주일에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 교회의 주변이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골에 와보니 이런저런 재주가 의외로 쓰임이 많다. 영어 하나만 예로 든 것이지만, 탁월하지 않아도 기타와 우쿨렐레 조금 치는 재주, 드럼 조금 치는 재주, 숲밧줄 좀 칠 수 있는 재주 등 그동안 교회 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쌓아왔던 재주들이 꽤 쓸모가 있다.

열 가지 재주 가진 놈 처자식 굶긴다지만, 시골 목회에서는 열 가지 재주가 모두 훌륭한 섬김의 수단이 된다. 얼마나 잘하느냐보다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고, 거기다가 섬김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재주를 뛰어넘는 또 다른 재주이다. 나는 오늘도 열 재주 가진 분들에게 러브콜을 보내본다. 다시 말하지만 탁월하지 않아도 괜찮다.

고광진 목사/정산푸른볕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