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

성인지 감수성

[ 주간논단 ]

김영미 변호사
2020년 07월 14일(화) 00:00
'성인지 감수성'은 영문으로 'gender sensitivity'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성별의 차이로 인한 일상의 차별과 불균형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감성' 정도로 해석된다. 1995년 중국에서 열린 제4차 유엔여성대회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우리나라는 2000년도부터 정책입안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필자가 이 용어를 처음 접한 것은 2014년 한국양성평등교육원의 성폭력예방강사 양성과정에서였다. 당시 이 용어가 주었던 생소함과 신선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용어는 4년이 지난 2018년에 대법원 판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법원은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제 '성인지 감수성'은 특정 직업군만의 전문 용어가 아니라 전 교인, 전 국민이 인식하고 실천해야 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하지만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행동들은 일반 사회는 물론 교회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고, 점차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성인지 감수성'을 키우는 일은 삶의 필수조건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언컨대, 우리는 과거의 보수적 사고의 틀을 벗어 던지고 우리 안에 오랫동안 '내면화된 성차별적 인식'을 과감히 탈바꿈시키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어떤 의도된 신체접촉이, 굳이 폭력이나 협박행위를 동반하지 않았더라도, 상대방의 동의가 전제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 성폭력이 될 수 있다는 인식부터 가져야 한다. 신체접촉의 의도가 상대방을 격려하기 위해서든, 위로하기 위해서든 또는 반가움을 표하기 위해서든 상대방의 동의가 전제되지 않았다면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행동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고 급기야 성폭력이라는 범죄행위로 치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 하나의 논픽션이 있다. 남자와 여자는 교회 청년부에서 처음 만났다. 여자는 낯선 교회 생활과 성경 말씀에 대해서 친절하게 알려주는 남자가 그저 고마웠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이성적인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남자는 저녁식사를 제안했고, 여자는 선뜻 수락했다.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공원 한적한 곳을 산책하다가 사건이 생겼다. 남자가 갑자기 여자의 얼굴을 감싸고 키스를 시도했다. 여자는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떤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여자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신앙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매일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불쑥불쑥 솟구쳐 올랐다. 여자는 1년여 동안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다가 남자를 강제추행죄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 여자도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저녁 제안에 선뜻 응한 것을 보고 확신을 갖고 스킨십을 한 것뿐인데 강제추행범이라니 불현 듯 억울함이 밀려왔다. 여기서 보여주는 남자의 행위는 드라마에서라면 남녀간의 일상적인 로맨스 소재로 포장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남녀간의 성인지 차이에서 비롯된 범죄행위로 치부될 뿐이다.

말하자면, 이성이 웃으면서 넥타이를 고쳐 매줬더라도 상대방이 스킨십까지 허락하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게 호감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교회의 목사, 장로 또는 어떤 조직의 상급자라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내 지위로 인해 상대방이 불쾌한 신체접촉을 인내하고 있거나 'NO'라고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성인지 감수성은 한마디로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기 시작할 때 서서히 우리 안에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이다.

김영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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