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연재 '널다리골'

여전도회 연재 '널다리골'

[ 여전도회 ]

한국기독공보
2019년 05월 09일(목) 17:34
(2) 선교활동 지원

연합회는 1962년부터 군 선교를 위하여 선교회원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1억 5천만 원의 기금을 마련할 때까지 연 1회 1000원씩, 비록 작은 금액이지만 전국의 여전도회원들이 60만 대군을 복음화하기 위해 군선교회원이 되었다. 선교 회원의 대상에 영아도 배제될 수 없었다. 영아 시기부터 가정과 교회가 선교 정신을 고취시켜야 한다고 보고 1963년 12월 선교부 내에 영아부를 설치하였다. 0세부터 5세까지의 어린이를 '보내는 선교사'로 양육하기 위해 부모가 아이의 이름으로 5000원을 평생 1회 헌금하도록 하였다.

다양한 선교활동을 위해 1959년 15200부의 선교 월력을 제작, 재정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전국 회원에게 10만 부 이상 판매하여 선교비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각 연합회에서 지회로,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는 달력은 선교에 동참한다는 긍지를 갖게 하며, 연합 활동의 의의와 위력을 몸소 체험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도구로 역할 하였다. 선교 월력의 첫째 목적은 선교에 필요한 재원조달이다. 이에 더하여 월력의 각 장에 파송 선교사들의 정보를 적어서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해야 한다는 선교동역자 인식의 확산에도 공헌하고 있다.

1978년 제작된 여전도회원 수첩은 여전도회의 실태 파악과 유기적 관계 형성을 위하한 것이다. 여전도회의 기구도, 당해의 과제, 월별 기도 제목, 임원단과 연합회 회장의 주소록, 연합회의 행사 일정, 인용 성구, 유관기관 연락처 등을 담았다. 수첩 발행 첫 해에는 200원에 판매하여 70만원의 이익금을 냈고, 현재는 3만 부를 발행하고 있다.

3. 신앙과 사회복지

6.25 동란과 월남 전쟁 이후 많은 전쟁고아와 상이군인이 발생하였다. 이에 병원, 양로원, 윤락여성, 소년원, 교도소 등지에서 여전도회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지역마다 사정이 달랐던 만큼 요구하는 것도 달랐기 때문에 초반에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차원에서 접근하려고 했으나 점차 해당 지역의 여전도회 연합회가 사회복지역할을 감당할 것을 권유했다.

(1) 군 선교를 통한 봉사 활동

여전도회는 육체적, 정신적 훈련을 받아야 하는 군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보람 있는 군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펼쳤다. 장병들의 수고에 대하여 기도하는 것에 더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고마움과 위로를 전하였다. 1960년에는 1만 켤레의 덧버선을 손수 만들어 보내고 토시를 짜서 전달했으며, 1977년에는 한겨울 보초병들의 마음을 녹여줄 따뜻한 사랑이 담긴 보온병 600여 개를 보내기도 했다.

(2) 산업 선교를 통한 봉사 활동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20년 동안에 한국은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을 했다. 그러나 도시가 농촌의 인력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청소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홀로 공장에서 일하느라 외롭고 고된 생활에 지친 청소년들의 갖가지 문제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윤락 여성, 교도소 등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여전도회는 이러한 시대적인 요청 앞에 제일 먼저 산업 선교를 시작했다. 1957년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강경구 전도사를 영등포 공장 지대로 파송하고 그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미국 교회 여전도회가 재정적인 뒷받침을 주로 담당하고 본 회는 영등포 지역의 60여 공장에 있는 3000여 명의 공장 직원에게 어머니와 같이 따스함으로 보살피며 위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주었다. 그 후 영등포 산업 선교는 크게 확장되어 각계의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본회도 전도부에 산업 전도회를 따로 두었다.

정부의 정책으로 구미공업단지에 90여 개 공장을 세우게 되자 1976년 고애신 전도사의 선교 활동비를 담당하고 상담 장소가 우선 필요하여 110만원에 전세를 얻어 주며 선교 사역을 이모저모로 지원해 주었다. 고애신 전도사는 3만 여 명의 여자 공장 직원들을 대상으로 상담, 교양지도, 성경 공부를 통해 고된 노동 속에서 영과 육이 함께 병들기 쉬운 산업현장에서 신앙의 희망과 소망을 주는 작업에 정열을 쏟았다.

(3) 윤락 여성 선교를 통한 봉사 활동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점차 증가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윤락여성의 수도 증가하였다. 그때 윤락여성을 위해 정부에서 경영하는 시립 동부여자기술원이 생겼다. 이곳에서는 윤락여성을 수용하여 1년 또는 3개월간 기술을 가르쳐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기술원을 금호교회 백명숙 권사가 책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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