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연재 '널다리골'

여전도회 연재 '널다리골'

[ 여전도회 ]

한국기독공보
2019년 05월 09일(목) 09:16
(2) 교단 분열과 여전도회의 화해 운동 (1960년대)

1959년 제44회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총회가 시작되자 신학교 문제를 둘러싸고 에큐메니칼과 NAE로 갈라져 논쟁은 확대되어 갔다. 경기 노회는 둘로 나누어지고 경기 노회 명단 문제로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개회 벽두부터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자 총회장이 정회 선언을 하였다. 이후 양측 지도자들이 통합 운동을 했으나 결국은 신학교 문제와 WCC 가입 건으로 회의는 결렬되고 NAE는 '합동', 에큐메니칼은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분립하게 되었다.

당시 회장 주선애 씨와 총무 이필숙 씨는 화해 운동에 나서서 "여전도회는 싸우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전국 각지의 회원들에게 보내어 조용히 기도로 어려운 때를 이겨나갈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총회가 완전히 분리되면서 총회 산하 단체인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역시 합동, 통합 양측으로 나뉘게 된다.

(3) 교회 내 여성안수 청원

1946년 해방 후 첫 총회에 여전도회 연합회의 지도적 인물인 김필례, 유각경, 신의경, 김말봉 제씨가 '여장로' 제도를 청원한 바 있다. 이에 총회가 38선이 없어지고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 문제를 보류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무 씨를 주축으로 끊임없이 여장로 제도를 추진해온 바 있다. 번번이 논의도 않고 기각해 버리는 등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1956년 총회 중 서울노회장 한경직 목사가 권사직을 평생직으로 해달라는 안건은 허락하였다.

1961년 제46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장 최이권 씨의 '여장로' 청원의 건을 토의한 바, 1년 연구하자는 동의와 기각하자는 개의가 있었다. 투표 결과, 가하자는 의견이 84표, 불가하다는 의견이 42표로 결국 기각되었다. 2년 후인 1969년 제34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주선애 회장은 '여장로'를 청원하는 전략에 변화를 꾀했다. 청원은 계속하되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산하 27개 연합회가 각기 서명 날인하여 소속 노회에 청원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던 것이다.

1970년부터 각 연합회에서 소속 노회에 청원서를 내는 등 꾸준한 노력이 계속되면서 1978년 제63회 총회에 실낱같은 희망의 빛줄기가 비쳤다. 여러 노회에서 헌의안건으로 채택하여 상정된 안건 가운데 총 투표수 405표 중 가하다는 의견이 197표, 불가하다는 의견이 208표로, 단 11표차로 부결됨으로 여장로 청원 통과가 이제 시간문제임을 예감토록 했던 것이다.

2. 신앙과 경제

(1) 여전도회 회관 건립 추진

1960년대 김필례 회장과 주선애 회장 당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의 이필숙 총무(1958.6~1961.8)는 선교를 위해 헌신한 여성리더십이다. 특별히 선교 재정 조달을 위해 창의적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그 예가 1959년에 제작하기 시작한 선교 달력과 선교 브로치, 선교 관 임대 등이다. 이 사업들은 지속적으로 선교 재정의 기반이 되었다.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총회는 1963년 회관 건립을 건의하고 기금 모금의 일환으로 1963년 10월 3일 선교회관 건립을 위하여 선교 브로치 2만 개를 제작(개당 200원)하여 기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제30대 대회(1964)때 여전도회관 건립을 선교관 건립으로 변경하도록 결의하고 모금한 결과(1964~1988) 총 7,820,478원이 모금되었다. 건축을 위한 대지를 구입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서 현재 종로구 연지동 136번지 기독교회관 안에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선교관으로 47평 건물을 매입하였다. 국내외적으로 요청되는 선교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회원들의 헌금만으로는 다 감당할 수 없으므로 지속적 재원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건물을 장만하고, 건물 일부는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사무실을 임대하는 등 선교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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