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눅 13:18~21, 마 13:31~33)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눅 13:18~21, 마 13:31~33)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김형동 교수
2019년 05월 03일(금) 09:26
비유야말로 예수의 근본적인 이야기이다. 비유의 본질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인습적인 신화를 깨뜨림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 비유의 가장 큰 특징은 놀라움과 역전성으로 인습적인 세계를 뒤집는 엉뚱성(extravagance), 곧 역설과 해학적인 풍자에 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흔히 (가장) 작은 것이 큰 것이 되었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하지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도 아니요, 작은 씨가 자라 큰 것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다. 오히려 우리는 비유에서 '나무가 된 풀의 사연'과 감춰진 것이 드러나게 됨을 목도하면서 예수 첫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부터 그들 자신들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를 보게 된다.

우리는 겨자씨 비유에서 '정원'(개역개정: 채소밭)과 '나무'라는 두 개의 파격을 만난다. 겨자는 미쉬나에서 관목(덤불)으로 분류되고 있다. 겨자는 관상의 가치도 땔감으로도 쓸 수 없는 하찮고 들판 곳곳 지천에 널린 덤불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마치 잡초와도 같다. 따라서 율법에 의하면, 겨자씨를 정원에 심는 것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비유가 말하는 역설은 이러한 겨자씨가 정원에 심겼고, 자라서 풀(덤불)이 아닌 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비유는 또한 '부정함'이라는 이미지를 가진다. 겨자씨를 다른 씨와 함께 정원에 섞어 심는 것은 미쉬나(m.Kil 1:14)에서 금지되었기 때문에 사람은 율법을 범하고 있다. 누룩 비유에서도 부정적인 요소들(누룩, 여자, 숨기는 행위)이 있다. 두 비유는 거룩한 것을 구성하는 전통적 생각에 도전하는 '부정함의 은유'를 제시한다. 겨자씨와 누룩의 이미지는 전통적인 종교적/정치적 '왕국'이라는 상징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다. 공중의 새들에게 쉼터를 마련해주는 커다란 나무는 전통적으로 세상 왕국(겔 31:1~18의 바로의 왕국, 단 4:12의 느부갓네살의 왕국)을 상징한다. 겨자씨 비유는 조그마한 겨자씨와 커다란 나무 사이의 익살스러운 풍자에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나무가 된 씨의 대조와 변화(transformation)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눅 13:19c).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됨으로써 기존의 전통적 이미지를 비틀고, 커다란 나무가 상징하는 정치적 종교적 제도의 지배를 희화화한다.

누룩 비유도 작은 양의 누룩과 커다란 양의 부푼 반죽 사이의 대조를 단순히 반복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누룩 비유는 '감춰진' 상태와 드러난 현재의 실재 사이의 대조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감춰졌지만 강력히 활동하여 이미 밀가루 '전부'를 부풀게 했다. 주목할 것은 '가루 서 말'이라는 분량이다. 밀가루 서 말은 약 100인 분의 빵을 빚을 수 있는 분량으로 보통 가정에서 빚는 양이 아니다. 구약성서에서 '서 말'이라는 분량은 신현현 또는 하나님의 개입의 사건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세 사자를 대접하기 위하여 세 스아의 양으로 빵을 굽게 했다(창 18:6). 기드온과 한나는 각각 야훼의 천사와 야훼의 성전에 바치기 위해서 서 말에 해당되는 한 에바로 빵을 만들었다(삿 6:19; 삼상 1:24).

두 비유는 시작 단계의 미미함과 그 최종적 완성 단계의 장대함을 예리하게 대조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역설적인 면을 드러낸다. 겨자와 누룩이라는 구상물은 율법적으로 정결치 못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급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현재의 실재와 앞으로의 희망으로 진행되고 있음과 마침내는 세상의 권세 있는 자를 조롱하는 역전 드라마가 일어날 것을 강렬하게 시사한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의 역사는 지금 '하찮고' '변변치 못하고' 심지어는 '문제성이 많은' 이들 가운데 활동하고 있다(고전 1:27-29 참조). 두 비유는 개인적으로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경구와 김수영의 시, '풀'을 떠올리게 한다. 산중에 있는 나무 가운데 가장 곧고 잘생긴 나무가 제일 먼저 잘려서 서까래 감으로 쓰인다. 그 다음 잘생긴 나무는 자라서 기둥으로 쓰이고, 가장 못생긴 나무가 결국 큰 나무로 자라서 산을 지키는 고목나무가 된다. 산을 푸르게 하는 것이 나무만인가? 거목만으로는 산을 푸르게 만들지 못한다. 풀(잡초)이 없다면 푸른 산을 만들지 못한다. 산의 절개지를 보라. 제일 먼저 돋아나서 산을 산 되게 하는 것은 풀(잡초)이 아닌가!

인접한 문맥(Q 자료) 내에서 두 비유는 예수 그룹의 정체성을 인정하기 위해서 활용되고 있다. 앞선 본문에서(눅 12:49-56), 예수 그룹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결과적으로 가족이 나누어지는 고통스러운 아픔(즉, 세대 간의 갈등)을 경험했다. 그리고 예수는 천지의 날씨는 분간하면서도 현재의 실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질책하고 있다(눅 12:54-56). 두 비유는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지배 체제를 조롱할 뿐만 아니라, 두 비유의 인접한 문맥에서 현재의 참된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감춰졌지만 활동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이다." 두 비유로써 예수 그룹은 가족 내의 갈라짐이라는 고통스런 경험의 실재를 재해석하며, 더 나아가 자신들이야말로 '특별한 은혜'로 '계시를 받은 자들'이라는 신분을 강조함으로써 그룹 정체성을 정당화하고 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눅 10:21, 마 10:25).

김형동 교수/부산장신대·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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