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연재 '널다리골'

여전도회 연재 '널다리골'

[ 여전도회 ]

한국기독공보
2019년 04월 11일(목) 10:18
2. 개인윤리와 공동체적 윤리의 조화

1) 신앙과 정치

가. 교회 밖 정치

① 3·1 운동

1919년 3월 1일 일어났던 3·1 운동이 거족적 항일 민족운동이 되기까지 선도적인 역할을 한 모임들이 있었다. 그 중 각계각층의 수많은 기독교계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다. 김마리아, 김순애, 황에스더, 황애덕, 임영신 등이 그들이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여학생들도 거의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앙을 가진 부인들도 집안에만 있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많은 여성들이 뜨거운 민족의식과 주체적인 자각을 갖고 조국의 독립회복을 위해 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자료 중 '1919년 말까지의 3·1운동 관련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총 검거자 중에서 17.6%를 차지하고 있으며, 종교인 가운데 가장 많은 3426명이었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수는 총 471명 중 309명이 기독교인으로 65.6%나 차지했으며, 그 중 장로교 여성은 232명으로 여성 검거자의 반을, 장로교 남성의 10분의 1을 차지하였다. 한편 1919년 10월에 열린 장로회 총회의 발표에 따르면, 장로교회가 당한 참화 가운데 감금된 남자신도가 2125명, 여자신도 531명으로 남녀가 4대 1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당시 여성의 사회 활동이 사회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장로교 기독여성들이 국가적 운동에 4대 1의 비율로 목숨을 걸고 참여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구한말부터 여성 해방과 지도자 양성에 힘써오던 기독교 여성리더십 교육의 열매가 3·1운동을 통하여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특히 애국심과 대한독립을 위한 섬김의 리더십이 증명되었다. 이후 장로교 여성들은 항일여성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②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활동

기독교 여성 리더십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종전의 혈성애국부인회, 대조선애국부인회, 경성애국부인회, 송죽회 등 모든 여성 애국단체를 총괄한 것이다. 각 여성애국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결성된 애국부인회는 김마리아 선생(전국연합회 제7~10대 회장 역임)을 회장으로 모시고, 각 도마다 지부를 두고 맹활약하였다. 애국부인회는 나라의 독립을 되찾는 그 날까지 다같이 생명을 걸고 일제에 맞서 싸울 것을 결사적으로 다짐하고, 막대한 금액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애국부인회의 활동이 발각되었고, 임원진은 물론이고 각 지방 지도급 인물 모두가 체포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사상범은 대구 형무소로 감금되었는데 이 때 김마리아 회장과 모든 임원이 함께 투옥되었다. 이 시기에 전국의 독립운동 투사들이 색출되고 애국부인회 지도자는 거의 다 체포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놀라운 사실은 투옥 후에도 기독교 여성 리더들은 오히려 감옥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 죄수들의 생활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여성리더십은 개인적 신앙고백과 민족사랑, 다시 말해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조화시킨 통전적인 복음을 역사적 현실 속에서 실천한 모범적 전형이라 할 수 있다.

③ 신사참배 반대

일본은 한국교회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박해했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사건은 '105인 사건'(1911)과 '3·1운동에 대한 보복'(1919),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가해진 박해'(1935~1945)였다. 이 시기는 한국 교회의 위기 및 대 환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각종 위협 끝에 기독교 학교는 폐교령을 내렸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 참배를 강제로 가결하였다. 이로서 교회가 박해에 굴복한 셈이 되었다. 이때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회의 시작 시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례를 하지 않겠다고 하여 1937년 대회는 모이지 않고 실행위원만 모여서 선교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경찰관이 김마리아 부회장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그것을 눈치 채고 이미 피하여 일이 수습되었다. 여전도회는 총회가 신사참배할 것을 결의한 후에도 계속 항거하여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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