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최초 선교사 '김순호'

여전도회 최초 선교사 '김순호'

[ 여전도회 ] 주선애 교수 특별기고

주선애 명예교수
2019년 04월 04일(목) 08:33
1928년에 창설된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1929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제2차 총회를 열었다. 제일 먼저 총회에서는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세계선교의 대상은 중국여성들이었다. 그간 대국(大國)의 여성이라고 생각했던 중국여성들이 발을 묶고 다니는 것을 보며 긍휼의 마음이 들어 그들을 복음으로 해방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치하게 되었다. 다음 해에 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허락을 받고 1931년 9월 11일에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에서 제3회 총회를 갖고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운 첫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다. 그때 첫 여성선교사로 김순호 선교사가 피택 되었다. 이로서 한국 여성사역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 것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가난과 무지 속에서 갖혀서 사는 것에만 익숙했던 한국여성들이 구속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자아를 발견하고, 동시에 세계사회에 대한 선교적 소명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고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되었다. 눌려 있었던 것만큼이나 폭발적인 기세로 세계선교에 뛰어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한국여성을 통해 세계선교를 일으키시고저 김순호 한 사람을 미리 여성선교사로 선택하셨던 것이다. 한국 여성을 통하여 세계선교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우리 여성들을 일깨워 주셨고 크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신 것이다.

김순호 선교사는 황해도 재령읍 동부교회, 김두한 장로님의 딸로서 1902년 5월 15일에 태어났다. 그는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요꼬하마 여자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 후 여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다시 자기 고향 교회인 재령 동부교회의 전도사로 일하던 중, 여전도회연합회에서 중국선교사를 공모하였을 때 피택되어 중국 산동성에 독신여성 선교사로 파송 되었다. 김 선교사는 산동성에서 고 방지일 선교사와 함께 중국인들을 전도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므로 부득불 한국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국 후 한국을 순회하며 만주까지 다니며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1945년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면서 닫혔던 평양신학교가 새롭게 개강을 하게 되면서 이전에 없었던 여성부가 만들어졌다. 그때 마침 중국 선교지에서 돌아온 김순호 선교사를 신학교의 여성부 사감 겸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위촉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여성부 학생 수십명은 신학교에 여성 교역자들의 양육의 길이 열려진 것을 기뻐하였다. 또한 훌륭한 선생님을 모시고 성경을 배우며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처럼 즐거운 삶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환란은 또 다시 우리에게 닥쳐오고 말았다. 그것은 김일성이 권력을 잡고 강성해지면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여학생 기숙사에 머물고 있었던 몇몇 여학생들(이연옥, 조순덕, 김병숙 등)이 모여서 남한으로 탈출할 것을 결정한 후에 김순호 선교사를 찾아 갔다.

"우리 몇 사람은 서울로 피난가기로 결정 하였는데 선생님을 모시고 가기로 했습니다" "선생님 같이 가십시다. 꼭 함께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선생님도 준비하세요" 선생님은 태연한 표정으로 "나는 못가! 당신들이나 가라구" 하셨다. 학생들은 놀란 표정으로 "아니 선생님? 왜 못 가셔요" "자녀가 있나요? 많은 재산이 있나요? 못 떠날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신들이나 어서 가라구 나는 못가..." 학생들은 어린애들처럼 졸라댔다. 그때 선생님은 진정한 속사정을 털어놓으셨다. "가다가 인민군을 만나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면서? 나는 죽어도 거짓말은 못해, 아무래도 죽을 것이라면, 나는 북쪽으로 더 올라가서 한 마리 양이라도 더 구하고 하나님 앞에 갈거야"

대답은 단호했다. 학생들은 뜻밖에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 죽음을 결단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마음이 찔렸지만 돌아오고 말았다.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선생님의 거룩한 결단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신의주로 올라가서 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시던 중 어느날 새벽기도 때 폭도들에게 끌려간 후 소식이 끊어졌다. 순교하신 것이다.

순교자가 된다는 것은 환난 중에 우연히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순교자의 영적 생활 그 자체가 앞서야 순교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분의 순교는 우리 장로회 총회 선교부 총무였던 이권찬 목사님에 의해 확인되었다. 중공군과 인민군이 북으로 쫓겨 올라갈 때 같이 따라 가셨던 이권찬 목사님이 그 분의 시체를 직접 보셨다고 증언하셨다.

김순호 선교사는 중국 산동성 선교를 할 때, 마음에 흡족할 만한 선교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께 나아가 금식하며 자기의 죄를 더 철저하게 회개하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그의 말씀에는 능력이 함께 했다. 때로는 "여러분 하나님의 상 받을 준비가 되었나요?" 등으로 회개를 촉구하곤 했다. 그의 열정적인 부르짖음에 중국과 만주에서 많은 열매가 거두어졌다. 그 분은 주님의 피가 흐르는 사랑의 실천과 회개의 열정이 흘러넘치는 삶을 사셨다.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한 회개가 강조되곤 했었다.

오늘 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우리는 김순호 선교사처럼 목숨을 건 진실한 삶이 있는가?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한 산 재물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주선애 명예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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