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

'민족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4. 조만식 <1>조만식과 일제 강점기의 기독교 독립운동

박명수 교수
2018년 11월 13일(화) 18:26
조만식 장로는 1905년 숭실중학에 입학해 1908년 졸업(제5회)을 했다. /사진제공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해방 직후 북한사회의 가장 중요한 민족지도자는 조만식이었다. 당시 남한에는 수많은 지도자들이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싸웠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유일하게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지도자는 조만식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하나님은 북한 땅에 오직 조만식 한사람만 남겨 놓으셨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조만식이 어떻게 북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남은 지도자가 되었을까? 이 이야기의 시작은 그의 숭실학교 입학에서 시작된다. 조만식은 전형적인 평안도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지주는 아니지만 상당한 땅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덕에 조만식은 평생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형적인 서북 사람답게 어려서부터 상업을 배웠고, 어느 정도 성공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성공은 그로 하여금 타락하게 만들었다.

이 때 그의 친구가 숭실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하였다. 새로운 돌팔구를 찾던 조만식은 이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는 친구들을 모두 모아 놓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 새벽 녁에 친구들에게 일대 선언을 하였다. "내일부터 조만식은 새로 태어난다." 그리고 곧장 그는 숭실학교 교장이던 베어드를 찾아갔다. 베어드는 왜 공부를 하려고 하는가 물었고, 여기에 대해서 조만식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 그는 과거의 모든 악습을 끊고 하나님의 일에 목숨을 바쳤다.

조만식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과 민족의 일은 두 가지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만식은 민족을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조만식이 생각하는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는 교육을 통해서 건전한 기독교시민을 양성해 내는 것이 바로 조국을 사랑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은 이승훈, 안창호를 계승한 서북 기독교의 전통이기도 했다.

조만식은 먼저 자신이 일본에 가서 영어를 배우고, 법학을 전공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조만식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었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한 일은 바로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의 교장이 된 것이다. 조만식은 오산학교에서 기독교와 나라사랑을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한국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영락교회를 세운 한경직, 순교자 주기철, 사상가 함석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조만식은 한 사회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건전한 시민운동이 일어나야 하며, 이런 시민은 경제적인 자립 가운데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만식이 생각한 것은 민족기업을 살리는 일이었다. 당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일산 제품을 배격하고, 조선사람들이 만든 물건을 애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건전한 민족기업이 육성될 때 진정한 독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만식은 사업가를 부르주아로 매도하지 않고, 그들이 민족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이같은 조만식의 애국 민족운동의 배후에는 그의 기독교 신앙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평생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동경 유학시절에는 재일한국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귀국한 다음에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장로로서 봉사하였다. 그는 담임목사인 주기철과 함께 신사참배에 반대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민족을 사랑했다.

박명수 교수 /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