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한 여걸

평생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한 여걸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2. 김순애 <3> 독립운동의 산증인, 87세 별세

임희국 교수
2018년 10월 16일(화) 11:44
상해애국부인회 회장 시절 김순애 여사가 대한애국부인회에 보낸 문서. /출처 독립기념관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의준비회가 소집 선언서를 발표하고 9월 1일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고 공고하였다. 그 후 각처에서 국민대표회의 촉성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준비 작업 끝에 마침내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3일에 개막하였다. 이 회의에 국내, 상해, 만주 일대, 북경, 간도, 연해주, 미주 대륙 등에서 활동하는 135개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모였는데, 최종 125명의 국민대표가 확정되었다.

김순애는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했다. 본회의는 회의규정 및 일정을 마련하고 독립운동방침을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군사·재무·외교·생계·교육·노동 등 6개 분과를 두었다. 회의는 분과를 중심으로 제반 문제를 구체적으로 토의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시국문제 곧 임시정부에 관한 의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의견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3년 3월 9일 본회의에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조 제의안(시국문제)에 대한 의제를 둘러싸고 토론은 크게 창조파(創造派), 개조파(改造派)로 분열되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반(反)임시정부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반면에, 개조파는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이 전 민족의 독립운동인 3.1운동에 있으며, 임시정부는 3.1운동의 결과물이고 지금도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기에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계속해서, 이들은 만일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에서 새로운 최고기관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3월 21일 의장이 개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려 하자, 창조파가 이에 반대하여 본회의에서 탈퇴하였다. 4월 11일부터 다시 정식회의가 개회되었으나 임시정부를 둘러싼 시국문제에 대하여는 이견(異見)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개조파 일부(만주지역 대표)가 5월 15일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했다. 6월 3일 창조파만으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새로운 기관을 세워 국호를 '한(韓)'으로 정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7일 새로운 헌법 제정과 함께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민대표회의 폐회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개조파 위원 57명이 반대성명을 냈다. 임시정부 또한 이에 반대하여 내무총장인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한편 국민대표회의 내에는 창조파와 개조파 이외에 중도파로서 통일적 대단합을 주장하던 입장이 있었으나 지지 세력이 미미했다.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의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종결된 국민대표회의 이후, 김순애는 여전히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 했다. 1926년 7월에 그녀는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발족시켜 재정난에 허덕이는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 홍보,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녀는 1930년 8월 16일 한국독립당 산하 여성 조직인 '한인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하여 김구경(金九經) 박영봉(朴英峰) 등과 함께 활동했다(1933년까지). 한편 상해 일본 영사관 경찰의 수배로 수시로 피신하면서 안정적인 생계를 잇지 못하던 남편 김규식을 대신하여 그녀는 삯바느질, 하숙집, 와이셔츠 공장운영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감격의 광복을 맞이하여, 김순애는 11월에 임시정부 환국 제1진에 함께 귀국했다. 1946년에 그녀는 모교인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47년 10월 1일 '민족자주연맹' 조직에 참여했고, 곧 이어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50년 이후에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김순애는 1976년 5월 17일 별세했다. 고인(故人)은 1977년 3월 1일(삼일절)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임희국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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