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독립 위해 몸 던지다

민족의 독립 위해 몸 던지다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 열전 2. 김순애 <1>기독교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임희국 교수
2018년 10월 02일(화) 09:56
김순애(金淳愛, 1889-1976)는 기독교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김순애의 형제자매인 필순(오빠)과 필례(동생) 그리고 조카 김마리아(본명 김진상) 등은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며 헌신한 신앙인이었다.

김순애의 오빠 필순(弼淳, 1878-1919)은 한국 최초의 의과대학인 '의학교'의 제1회(1908) 졸업생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김필순을 비롯한 졸업생 7명에게 '의술개업인허장'(醫術開業認許狀)을 수여했다. 의학교에서 전임교수로 일한 김필순은 해부학과 생물학 등을 강의했다. 그의 스승인 의료선교사 에비슨(魚丕信, Oliver R. Avison)과 함께 그는 해부학 교재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 결실로서 3권의 한글 '해부학'이 출간되었다. 그는 1911년 서간도 통화현(通化縣)으로 갔다. 여기에는 이미 독립군 기지가 건설되어 있었고 또 한국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병원을 개업한 그는 학교 병원 도서관 등의 근대 시설을 갖춘 이상촌을 건설해 나갔다. 마을의 경제는 농업중심으로 하고 주민들이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되 공동으로 농사일을 하며, 농기구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마을 공동 창고를 설치하며, 공동 목욕탕에서 하루 종일 농사로 지친 몸을 풀게 하고자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주민들이 야학교에서 배우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실력을 양성하게 하고, 또 모든 가정의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게 하며, 아픈 사람은 무료로 병원에서 진료 받는 이상촌을 꿈꾸었다. 동네 치안 또한 스스로 유지하고, 마을에 소비조합을 설치하도록 구상했다.

김순애의 조카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1944)는 일본 동경에서 유학을 마쳐가던 1919년 2월 '재일조선청년독립단'의 2.8 독립선언대회에 참석하였고 연이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귀국했다. 서울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3월 6일에 그녀는 정신여학교 교무실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때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 7월 24일 가석방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그녀는 정신여학교에 복직하였고, 그리고 항일 여성운동을 구상했다. 10월 19일에 여성 대표 18명이 모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새로 발족하는 자리에서 그녀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1월 18일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이 발각되어 그녀와 여러 동지들이 당국에 체포되고 연행되었다. 투옥된 김마리아는 5개월 이상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병보석을 받아 입원하여 치료받던 그녀는 망명을 꾀하였고, 가까스로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서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이제, 소개하려는 김순애는 1889년 5월 12일(음력)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마을)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贍)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손위로 오빠가 둘이었는데 윤오와 필순이었고 또 손아래 동생이 필례였다. 그녀는 소래교회 제2대 신앙인으로 자랐다. 그녀는 소래마을에서 송천소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로 유학 와서 연동여학교(정신여자중고등학교 전신)에 진학했다.

1910년 김순애는 부산 초량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이때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겼고, 일제는 학교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치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하숙집에 학생들을 불러 모아서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그런데 이 일이 발각되었다. 1912년 그녀는 오빠 필순이 병원을 개업하고 이상촌을 건설하고 있는 서간도 통화현으로 망명했다. 1915년에 그녀는 중국 남경의 명덕여자학원(明德女子學院)에 입학했다.

임희국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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