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민족의식의 성숙 결과"

삼일운동, "민족의식의 성숙 결과"

한국기독교학술원 세미나에서 이상규 교수 강조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18년 06월 01일(금) 17:10
삼일운동의 동기는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주류를 이뤘던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 영향을 끼쳤고 일제 무단 정치 10년을 통한 민족의식의 성장과 자유와 독립을 향한 국민의식의 성숙이 가져온 결과이며 이 과정에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기독교회와 기독교학교가 구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 당시 기독교의 참여와 역할을 되짚어보는 세미나에서 '3.1운동과 한국교회'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이상규 명예교수(고신대)는 "유럽에서의 패전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한국 민족의 독립을 위한 삼일운동의 거국적 시위의 진정한 동인이라고 보기 어렵다"면서 "일제의 무단 정치와 수탈, 그리고 생존권마저 위협받게 됐을 때 자연스럽게 분출된 결과"라며, 삼일운동의 배경 중에 외적 요인보다 내적 요인에 무게를 뒀다.

삼일운동의 구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교회의 피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1919년 10월 4일 장로교 총회가 개최됐을 당시까지도 교회 지도자들의 피살 혹은 구금, 교회당의 파괴 등으로 교회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고 총회장이었던 김선두 목사는 투옥 중에 있어 총회에 참석하지 못해 부총회장인 마포삼열 목사가 개회예배를 인도했다"면서 "이때까지 수감된 교인은 1642명이었고 체포됐다가 풀려난 자가 2162명, 사살되거나 맞아 죽은 사람이 47명, 교회당 파괴 12개 처였다"고 소개했다.

특히 삼일운동의 이후 일제의 폭압적인 학살과 조선 독립에 대한 국제 여론형성에 기여한 이들이 주한 선교사들이었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는 "삼일운동 당시 국내에는 로마 가톨릭의 54명의 선교사를 포함해 40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심정적 동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면서 "선교사들이 중립의 경계를 넘게 만든 것은 그들의 목격한 만행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날조된 105인 사건 이후 선교사들은 만행 앞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고 인식했고 제암리학살 사건에서 이런 인식은 삼화됐다"면서 "당시 선교사들은 사신이나 공식적인 보고서를 통해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운동을 본국교회에 보고했고 안식년이나 기타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간 선교사들을 통해 식민지배 하에서의 조선에서의 정치적 상황이 구미 사회에 공표됐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요인으로, 첫째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 둘째 기독교계의 민족의식 혹은 민족운동 전통, 셋째 기독교 신앙에 대한 탄압과 식민지배 거부운동을 통한 기독교적 가치 실현 등을 제시했다.


김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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