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알고보니 000'이었다

루터는 '알고보니 000'이었다

[ 문화 ] 음악, 미술, 스포츠, 건축 등 문화에도 영향 미친 루터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7년 10월 24일(화) 09:57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은 단순히 독일 내 종교 분야에 국한된 개혁이 아닌 당시 유럽 사회 전 분야에 있어서의 개혁(reformation)이었다. 특히 개혁가로서의 강한 이미지를 가진 루터가 당대의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세간에 덜 알려져 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본보 문화면에서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루터의 영향에 대해 알아본다.

# 알고보니 루터는 '음악애호가'였다

"음악은 마음 속의 모든 감정을 일으킨다. 세상에서 음악만큼 슬픈 이들을 기쁘게 하고 기쁜 이들을 슬프게 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교만함 사람을 겸손케 하며 질투와 증오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위의 말은 마틴 루터가 한 말이다. 루터는 신학자가 되지 않았으면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만큼 음악을 사랑했으며, 소년합창단 출신으로 플루트와 류트를 연주했고, 작곡도 할 수 있는 음악인이었다.

그는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사로잡혔을 때 시편 46편의 말씀에 감동 받아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 작곡했다. 이외에도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권위적이었던 중세시대의 음악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교회음악이 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예배 음악은 성직자와 성가대의 전유물로 회중은 찬송가를 따라 부를 수 없었으나 루터는 모든 회중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며 어려운 라틴어 찬양 대신 독일어 회중 찬송 '코랄'이 불릴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독일 민요에 찬송 가사를 붙여 일반 회중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하는 등 개신교 교회음악 발전을 이끌었다. 루터는 요한 발터, 젠플 같은 음악가의 조력으로 코랄 레퍼토리를 만들었는데 코랄은 많은 오르간곡의 원천이 됐으며, 200년 후 바흐 작품에서 절정을 이뤄 교회음악의 새로운 성장을 견인했다. 

# 알고보니 루터는 '미술매니아'였다

루터가 비텐베르그대학의 신학교수로 있을 때 당시 비텐베르그성의 궁정화가로 있던 루카스 크라나흐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크라나흐는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이후 루터를 도와 그의 신앙과 철학이 담긴 글에 그림을 그려넣어 민중들의 이해를 도왔다.

크라나흐는 16세기 독일회화의 중요한 인물로 궁정 초상화, 제단화, 종교화, 판화 등의 그림을 남겼다. 또한 루터의 친구로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회적 배경 중 하나는 유럽에 목판 인쇄술이 발전했기 때문인데 루터의 글이 인쇄술을 통해 전 유럽으로 전해질 때 그 안에 크라나흐의 삽화 또한 함께 인쇄되어 보급됐다. 특히 루터가 1522년 최초로 번역한 신약성경에 21개의 목판화를 수록했고, 1534년 신구약 완역성서에는 123편의 채색 삽화를 삽입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을 출판할 때 마치 그림책을 방불케 할 만큼 그의 삽화가 많이 삽입되었는데 루터는 크라나크와 어떻게 성경의 말씀을 시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를 면밀히 검토하고 의논하며 공동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독일어 예배를 드리고 최초의 이종성찬이 행해진 비텐베르크시교회(성모 마리아교회)에도 크라나흐가 그린 제단화가 있는데 이는 급진적 개혁운동가들이 우상이라는 이유로 이전에 있던 교회의 성상을 파괴하자 숨어지내던 루터가 몰래 와서 성찬 모습을 담은 제단화를 다시 놓자고 했기 때문이다. 우상이라고 파괴했던 제단 위의 예술품을 루터가 다시 설치하자고 제안한 것은 크리스찬이 미술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미술의 기본철학에도 루터의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 알고보니 루터는 '스포츠맨'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볼링이 '보울즈'라는 이름으로 널리 유행했다. 보울즈는 나무토막과 나무 볼을 이용해 잔디 위에서 행해졌다. 루터 당시에도 독일교회에서는 볼링이 '케글링'이라는 종교 의식으로 변모해 스포츠와 신앙의식이 결합한 형태로 대중 사이에 퍼졌다. '케게르'라고 하는 막대기를 긴 복도 한구석에 세워 놓고 이를 악마로 간주, 둥근 물체를 굴려 쓰러뜨리는 방식이었다. 

루터는 케글링광이었고, 볼링의 기본 규칙을 처음으로 마련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볼링은 그 때까지 일정한 규칙 없이 행해지다가 루터에 의해 핀의 수가 9개로 정해지고, 다이아몬드형으로 배열되는 등 게임의 규칙이 정해졌다는 것이 정설처럼 알려져 있다. 현재의 10핀의 볼링의 모체가 되는 나인 핀 볼링의 체계를 만든 인물인 셈이다. 일설에 의하면,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성에 은신해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을 때 자신의 존재가 발각될 우려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하고 성 안에서 볼링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 루터, 교회건축에도 영향을 미치다

종교개혁은 당시의 교회 음악과 미술 이외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 이후 건축된 최초의 개혁교회인 작센주의 토르가우성 예배당은 루터의 정신이 처음으로 건축에 구현된 사례다. 니켈 그로만이라는 건축가가 루터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1540~1544년까지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이 예배당은 루터에 의해 봉헌되기도 한다.
이 예배당은 당시의 예배당과는 달리 특별한 장식이 없고 설교대와 제단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지 않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제단을 화려하게 꾸미고 제단 자체에 신성함을 부여했던 것과는 달리 루터는 단순한 탁자 형식의 제단을 가장 이상적인 제단으로 여겼다. 또한, 성직자가 회중을 등지지 않고 회중을 마주보고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전 교회 건축과 달리 설교대와 제단의 위치가 분리된 것은 루터가 예배의 두 요소인 말씀의 예전과 성만찬의 예전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설교대는 회중에게 소리가 잘 전달되도록 예배당의 중심에 놓았고, 성만찬 예전을 위해서는 교회 전통을 따라 동쪽 끝 제단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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