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공보 기획> 졸업 50주년 '장신 61기'

<한국기독공보 기획> 졸업 50주년 '장신 61기'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7년 10월 16일(월) 13:24

* 졸업 50년 맞은 장신 61기 모교에 발전기금 1억9470만원 전달
졸업 50주년을 맞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제61기(동기회장:윤공부) 동문들이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모교에 발전기금 1억9470여 만원을 기탁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장신 61기는 졸업 50주년을 기념한 홈커밍데이 행사를 12~13일 장신대에서 갖고, 재학생들과 함께 드린 모교 방문 감사예배를 통해 발전기금을 전달했다.

장신 61기는 1967년 12월 14일 78명이 졸업했다. 이 가운데 21명이 별세하고, 7명 주소불명, 9명 해외거주, 41명이 국내에 거주하며 두달에 한번 동기모임을 갖고 있다.

동기들 중에는 총회장으로 유의웅 목사와 안영로 목사를 비롯해 장신대 총장으로 고용수 목사가 배출되고, 아골골짜기같은 구석진 곳과 열방으로 흩어져 묵묵히 하나님나라를 섬긴 기수다.

▲ 장신대 신대원 61기가 12~13일 모교에서 홈커밍데이 행사를 가졌다. 이들은 후배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시일반 모은 1억9470여 만원을 발전기금으로 전달했다.

홈커밍데이 첫날은 임성빈 총장 초청 만찬과 장신대 비전 소개, 친교의 밤 등이 마련되고, 둘째날은 새벽기도회, 캠퍼스투어, 감사예배 등으로 진행됐다.

행사 둘째날 재학생들과 함께 한 예배에서 전달된 발전기금 1억 9470여 만원은 1명이 1억원을, 또다른 1명이 2000만원을 헌금하는 등 국내외 동기 25명 정도가 십시일반 모은 돈이다.

61기 모두 현직에서 은퇴하고 고령의 나이에 그리 넉넉하지 않은 형편임에도 노후생활 재원을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내어놓아 귀감이 됐다. 이들은 장신대가 장학금, 건축비, 복지기금 등 재량껏 사용할 수 있도록 발전기금으로 기탁했다.

김태규 목사(한빛교회 원로)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서 다시 자신의 후배들에게 환원이 되기를 소망한다"며 "모교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아름다운 전통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의미를 밝혔다.

동기회장 윤공부 목사(말씀원 원장)는 "부름받아 교문을 나선지 50년 만에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이제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안고 그리던 모교를 방문했다"며 "우리가 명예나 기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전통을 다시 한 번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장신 61기 졸업사진. 이들은 재학 시절 대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전하려 노력했다.

61기는 이번 발전기금 전달 전에도 개인적으로나 기수적으로 지속해서 모교를 후원해왔다. 소양주기철목사기념관 704호는 61기 동기들이 마련해준 강의실이다.

당시 총장이던 고용수 목사는 "동기생 일동이 재학시절의 수업 받았던 당시의 열악했던 교실를 기억하면서 건축헌금을 모아 후배들을 위한 강의실을 마련해주었다"며 "정겹고 애교심이 높은 기수라고 자부한다"고 설명했다.

유의웅 목사(도림교회 원로)는 "돌이켜 보면, 우리의 생애는 자나깨나 주님의 손이 보살펴 주셨다"며 "졸업 희년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동기들이 기쁨을 나누는 풍성한 가치경험의 기회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61기는 신학대학원의 전신인 학사원 3기(B.D.)로 졸업했다. 당시 건물 2동과 기숙사 1동뿐인 곳에서 연탄보일러를 때가며 어렵게 공부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조카 손동아 목사(인왕교회 원로)는 재학시절 기숙사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됐으나, 그 시간 방을 찾았던 동기 이용남 목사(장석교회 원로) 덕분에 살아나기도 했다.

▲ 장신 61기 동기들은 13일 손주뻘인 까마득한 후배 재학생들과 예배를 함께 드리고, 학교 발전기금으로 1억9470여 만원을 기탁했다. 모두가 현직에서 은퇴한 이들로 노후생활 재원을 아껴 발전기금으로 전했다.

61기 동기들은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이 많고 시국이 어수선하여 '기도'를 많이 했다고 회고한다. 아차산이 갈멜산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그곳에 거적때기를 가져가 무릎꿇고 기도하곤 했다.

61기는 영성이 올곧고 유난히 끈끈한 연대감과 단합을 보여준 기수이기도 하다. 특히 대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1964년 6월 3일 한일협정 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비상계엄령이 선포됐을 당시 1학년이던 61기는 학기말 시험을 끝내고 3일간 구국금식기도회를 가진 후 결의문을 채택하고 서울시청에서 기습시위를 단행했다.

그날 61기는 장신대에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시위에 참여하고자 비밀리에 영락교회로 각자 이동해 다시 집결해 뒷문으로 빠져나간 후 시청앞을 뛰어다니며 "반대"를 외쳤다.

61기는 당시를 회고하며 "거룩함이 사회속으로 들어가 빛을 발한다"는 일념으로 용기와 배짱이 나왔다고 말한다.

서울시경은 기습시위에 깜짝 놀라 트럭을 보내 학생 모두를 강제로 연행했고, 결국 관할 성동경찰서 구치소에서 하루를 보냈다.

1학년 반장이던 고용수 목사는 "임원들과 함께 하룻밤을 구치소에서 지내면서 개인별로 사건경위에 대해 문초를 받고, 이튿날 각서를 남기고 훈방되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61기는 장신대 학보 '신학춘추'를 처음 만들었다. 1965년 학교가 창간한 '신학세계'를 1966년 61기 재학생 중심의 학우회가 인수하면서 '신학춘추'로 제호를 바꾸어 정기간행물로서 장신대 소식지로 발행했다.

그리고 1965년 당시 1학년인 61기를 중심으로 'HoVo(Holy Voice) 중창단'이 조직되어 교내외 연주활동을 재학기간 중 계속해왔다. 이 중창단의 활동이 계기가 돼 장신대 신대원 중창단이 조직되어 지속적으로 맥을 이어 오고 있다.

유의웅 목사는 "호보 중창단은 실력이 출중했고, 애교심이 높아 강당 옆 정원에 학교배지를 시멘트로 제작해 만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주님의 종으로 부름받아 어려운 학업여건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동문수학하고 목회현장에 나가 목양일념 후 은퇴한 장신 61기. 동기 모두는 모교가 세계교회를 섬기는 신학교로 더욱 발전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건강한 목회자가 계속해서 배출되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기도하고 있다.

 

* 장신 61기 추억담
홈커밍데이 행사 첫날 저녁 61기는 '친교의 밤' 시간을 통해 신학교 입학 과정과 재학 시절의 간증을 겸한 추억담을 나누며 웃고 울었다. 50년 동안 몰랐던 동기들의 사연을 이날 처음 접하기도 하며 감동의 시간이 됐다. 다음은 '친교의 밤'에서 나온 61기 말말말.

▲ 장신 61기는 오랜만에 만난 홈커밍데이에서 서로의 과거 추억담을 나눴다.

- 장로교의 신학 정체성에 대해 토론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마다 우리의 결론은 장신대가 이념을 떠나 올바른 목회자를 키우는 곳이 되기를 바랬다.
- 일찍 별세한 동기 중에 관상을 보고 말해주는 독특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항상 내 코를 보고 '복코'라고 했다.
- 행복한 기수였다. 하나님나라 가기 전에 모국을 방문하고 동기들을 만나게 되어 감사하다.
- 졸업하고 50년이 어떻게 지났나 싶다. 한 교회에서만 목회하고 은퇴했는데, 현재 선교사로 활동하며 축복된 삶을 살고 있다.
- 신학교 입학할 때 주위에 기독교인이 없어 굉장히 어려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목사인 동기들이 부러웠다. 기도해주는 가족이 없어 새벽기도를 한번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던 게 떠오른다.
- 캠퍼스 커플 1호로 연애하며 공부했다. 법학을 전공하고 정치가가 꿈이었지만 폐질환으로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체험 후 신학교에 왔다. 동기 중에 폐질환자가 4명이었는데, 모두가 약골이어도 현재까지 건강하게 살며 목회를 해온 것이 감사하다.
- 아이 셋의 아버지로 신학교에 왔다. 젊을 시절 설교하기 무서워 목회하기 싫어한 기억이 있다.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집을 수없이 읽으며 이를 극복했다.
- 수업 받을 때 내 자리는 항상 출입문 옆이었다. 각혈을 많이해 기침이 나면 바로 뛰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이 40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히 살고 있다. 도서관에서 밤까지 공부하다 문을 닫으면 예배실로 가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던 생각이 난다.
- 목회 은퇴 전후가 똑같다고 주변에서 말한다. 그 이유는 '쓰리고'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한다.
- 기도를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동기들이 많아 감사하다.
- 집이 가난해 많이 굶으며 학교생활 했다. 선배들이 밥이라도 주자해서 '식감'을 맡겼다. 동기들은 내가 식감으로 밥을 많이 퍼줘서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한 것이라 본다.
- 대학졸업 하며 폐결핵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면 신학교 가겠다고 서원했고, 결국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 나는 체육반장이었다. 체육대회 하면 운동장 풀뽑는 일이 그렇게 지겨웠다.
- 그렇게 얌전하고 조용하던 안영로 목사가 총회의 수장인 총회장을 지내는 걸 보고 놀랍기도 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 우리 동기들과 공부해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응원단장으로 다른 신학교와의 체육대회에서 '말 박수'로 힘을 결집시켰다.
- 큰아버지가 손양원 목사님이다. 순교의 모습을 옆에서 보며 원망으로 한때 무신론에 빠지고 방황하다 대학 졸업 후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신학교에 왔다.
- 우리가 몰랐던 동기들의 학창시절 이야기 들으니 도전도 받고, 왜 몰랐을까 하는 미안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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