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경청

소통과 경청

[ 논설위원 칼럼 ]

채은하 교수
2017년 06월 07일(수) 10:03

지난겨울 대한민국은 참으로 어둡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 시간은 제19대 문재인 대통령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희망과 기대로 바뀌어가고 있다.

새 정부의 등장 이래 자주 듣고 있는 한 단어가 있는데, '소통'이다. 문 대통령은 그리 길지 않은 취임사에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을 3번이나 했다.

요즘에도 새 정부는 소통을 강조하고 그 소통의 실천이 마치 미담(美談)처럼 우리를 설레게까지 하고 있다. 얼마나 우리가 불통의 답답한 상황이었으면 그 단어와 몇몇 제스처만으로도 이렇게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할까?!

위정자와 국민,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선생과 학생 등 서로 간의 소통 문제는 단지 정치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온 국민의 고질병처럼 번지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권력자와 정치가와 국민이 서로 말하고 듣는 실천 방안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시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광화문에 소통 창구, 즉 '국민 마이크'라는 이름으로 민원 상담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우리의 소통 문제는 어떤가? 하나님의 대언자라는 명분 아래 목회자의 소통 방식은 지극히 일방적이지 않은가? 목회자는 말하는 사람이고, 성도들은 거의 듣는 사람으로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는 온통 목회자의 말과 동일시되기에 다수의 성도들은 교회의 이런 분위기를 답답해하고 있다. 적어도 당회원 정도의 직분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단지 '거룩한 방관자'(?)처럼 묵묵히 자신의 본분(예배와 교회 행사 참석 및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만 규정되고 있다.

특히 교회의 젊은이들, 단지 해야 할 일만 강요받는 듯한 불통의 현실을 힘들어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 교회에서 자신의 이야기도 진지하게 들어주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그 인내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한 후 그는 하나님께 소원을 기도로 간청했다. 그가 드린 간구는 이제 왕이 되었으니 '듣는 마음'(개역성경은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재판을 잘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왕상 3:9b).

솔로몬이 이 기도를 드린 후 곧이어 나온 이야기는 자기 아들을 찾아달라는 창녀를 재판한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다. 솔로몬의 이 재판은 수 천 년 동안 교회 안팎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가 이런 재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창녀들의 이야기를 잘 경청(듣는 마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통, 그것은 경청에서 시작되는 일이었고 그 소통을 통해 솔로몬은 훌륭한 재판을 한 지혜로운 왕이요 최고의 통치자가 되었다.

참으로 기대한다. 교회 안에서도 목회자와 성도들, 구세대와 신세대, 남성과 여성, 특히 어리고 젊은이들의 소리가 교회 안에 크게 들려질 수 있고 소통되기를 바란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종교개혁, 그것은 아래에서 위로의 소통의 길을 트자는 광야의 외침이었고, 꽉 막힌 권위주의적인 절대 권력의 교회를 향해 숨통의 길을 모색한 거룩한 운동이었다. 소통의 운동, 우리 교회 안에서도 널리 퍼져지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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