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동혜창/낙타와 깃털

연지동혜창/낙타와 깃털

[ 연지동혜창 ]

안홍철 목사
2017년 05월 08일(월) 12:03

예수님은 유대인 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같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께서 이방의 땅 두로에 발을 들이자마자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인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이방여인과의 대화 속에 '개'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는 집을 지키는 짐승으로 인간에게 충직하고 가장 친근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개와 관련된 속담은 비웃음이나 좋지 않은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요즈음 신조어로 남의 말을 무시할 때 '개무시' 란 말을 사용합니다. 접두사로 개가 쓰이면 대부분 욕설이 됩니다. 이처럼 표현 방법에 따라 그 의미가 천차만별인 단어도 드물 것입니다. 개는 부도덕하거나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고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을 경멸하는 용어로 쓰였습니다.

이방의 땅, 두로는 헬라인들이 사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항구도시 특성 상 배를 타고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미신과 우상 숭배가 극심하던 곳이었죠. 유대인들에게는 언제나 천한 개처럼 취급되던 구원의 여망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이방 도시에 '아무도 모르게' 도착하시려 했으나 한 이방 여인이 찾아와 발 아래 엎드려 귀신들린 자신의 딸에게서 악귀를 쫓아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선 여인을 향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사역을 펼치신 예수께서 왜 그토록 매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마도 그 이방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 같습니다. "네가 이런 말을 듣고도 진실로 고침받기를 원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주님의 시험 앞에 이방여인은 겸손하게 엎드렸습니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변론하지 않고 아주 절박하게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간절히 매달립니다. 결국 이 여인은 포기할 줄 모르는 주님을 향한 신뢰와 간절함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사막을 지나는 낙타가 쓰러지는건 이제까지 지고 온 짐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어디선가 날아온 깃털 하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깃털같이 가벼운 것일지라도 생각에 따라 지금까지 지탱해온 무게보다 수천배 더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자신에게 처해진 상황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불가능할 것 같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스스로 실패라고 여기면서 모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문제의 대부분은 실패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실패는 시도해 볼 용기 조차 갖지 않는 것 아닐까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가장 낮고 천한 말구유에 누이신 분.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며 다툴 때 조용히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겸손과 섬김을 몸소 보이신 스승.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 실패하고 낙심하여 포기하고 싶을 때 우리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위로하고 힘주시며 내게 능력 주시는 분,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안홍철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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