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의 청지기

권위의 청지기

[ 논설위원 칼럼 ]

이재훈 목사
2017년 04월 13일(목) 10:38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권위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18세기에 일어난 계몽주의 운동은 서구 문화에 자율과 자의식을 심어주는 운동으로 권위를 배척한 운동이다. 모든 것을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시험해보라는 요청은 가장 성스럽게 여겨졌던 전통의 권위까지도 의문을 제기해보라고 도전하도록 하였다.

계몽주의 이래로 과학은 여전히 권위로 군림하면서 이미 과학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과학자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엄청난 권위와 그에 대한 믿음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가 신앙의 영역에서는 부정되고 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부정으로 인해 하나님의 권위가 부정되고 있다. 인간들이 세운 거짓된 권위로 하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만물이 다스려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권위를 함께 창조하셨다(골 1:15~16). 이것은 선한 권세이다. 이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할 때에만 사용될 수 있는 권위이다. 하나님께서 권위를 제정하신 것은 얼마나 큰 모험인가!  하나님이 제정하고 위임하신 권위가 하나님을 잘못 대변한다면 하나님께는 얼마나 큰 위험인가! 그러한 위험이 현실이 되었다. 인간이 타락하고 반역했을 때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영적 권위 가운데 속하게 되었다(엡 6:12).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는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의 질문 속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권위'라는 단어이다. "저가 누구이기에 이런 권세를 행하는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놀랐는데 그 이유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던 것이 세상의 권위이다. 자신에게 절하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타락한 권위를 거절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의 권위는 거부하셨지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활동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인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행하셨다.

예수님은 권위에 대하여 세 가지를 보여주셨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 행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5:30). "권위의 청지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권한조차도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7:16).

둘째로 예수님은 권위를 사용하심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않도록 주의하셨다(요 7:18). 세상의 타락한 권위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높아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만든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그것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라는 권세로의 유혹이었다.

셋째로 예수님은 권위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데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권위가 있으신 분이셨다. 그런데 그 권위를 다른 삶들의 필요를 채워주는데 사용하셨다. 그러나 세상의 권위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라도 점점 더 많은 권위를 추구한다. 권위가 권력이 되고 권위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권세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영향력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예수님은 세상의 권위에 의지하는 권력자가 아니고 아래로부터 섬기시는 '권위의 청지기'이셨다. '권위의 청지기'로서의 예수님의 섬김은 십자가에서 끝났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이유는 예수님의 권위가 매우 강력해서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안에서 세상의 권세를 누리고 지위를 탐하는 지도자들을 비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권세자들의 요구대로 세상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으로 그들을 섬기셨다.

교회 개혁에 대한 많은 제언들이 있지만 가장 우선적이고 일차적인 과제는 목회자들의 세상적인 권력과 권위의식을 내려놓는 일이다. 시간과 물질의 청지기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주어진 권위의 청지기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는 상징으로 어린아이를 내세우셨다(마 18:1~4). 철없는 어린아이의 미숙함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어린아이들의 태도를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권력을 사용하는 데 낯설다. 세상적인 권세를 이용할 줄 모른다. 그러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오직 '권위의 청지기'로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이다.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청지기 의식이 회복된다면 교회개혁은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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