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무상한 몰락을 지켜보며

권력의 무상한 몰락을 지켜보며

[ 논설위원 칼럼 ]

김지철 목사
2017년 04월 04일(화) 13:56

지난 주 금요일(3월 31일)은 하루 종일 우울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보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정, 그리고 연이은 구속수감을 TV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아리는 아픔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동안 촛불 집회에 참석했건, 태극기 집회에 참석했건 그 마음의 착잡함이란 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이 참담하게 추락하는 국가적인 비극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이렇게 최고 정점에 도달했다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바닥까지 내려침을 당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 권력의 속성일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해방 이후 짧은 민주주의 과정을 겪으면서, 권력의 과도한 위력도 경험했다. 또한 독재자들의 억압과 탄압에 신음하던 국민들의 모습도 함께 목격했다.

무엇보다 그 권력의 무상함이 얼마나 처연한지를 실감나게 체험했던 우리들이다. 그런데도 그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권력이 지닌 매력과 막강한 힘 때문일 것이다. 권력자만이 느끼는 그 달콤한 환상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당대 권력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셨을까? 하늘의 권세와 영광을 지닌 분이 이 땅에는 권력 없는 가장 약한 자로 오셨다.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그래서 권력자들이 아니라, 그 권력에 억압당하고 있던 민중들이었다.

오히려 당대의 기득권자들이었던, 종교, 정치, 경제적인 권력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들어도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유대사회의 가장 치명적인 권력을 지녔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도전했다.

"화 있을 진저!"라는 선언은 종교적인 틀에서 외식하는 종교 권력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마 23장)뿐만 아니라, 자기 배만 불리고 있었던 경제적인 독점자들인 '부자들'(눅 6:24)을 향한 독설이었다. 기득권에 매몰되어 있었던 종교지도자들과 부자들에 대한 일종의 저주 선언이었다.

그렇다면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어떠했을까?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의 반응은 "저 여우에게 이르라"(눅 13:32)고 말씀하시면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선언하셨다. 세례 요한을 참수한 그 악한 헤롯의 폭력을 의식하면서도 의연하게 말씀하셨다. 그 메시지는 아주 명백하고 당당했다.

예수님의 병치유와 귀신축출, 오병이어의 기적들은 당시 민중들에게 '당신이 왕이 되시오'라는 인기와 환호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과감하게 단절하고 떠났다. 권력지향적인 사람들의 태도와는 거꾸로였다. 오늘의 정치 권력자들은 '당신은 영웅이다. 마땅히 당신에게 영광이!'라고 달라붙어 아부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그 순간에 분별력을 상실한 권력 중독증 환자로 전락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그런 환호를 받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가?

그렇다면 오늘의 영적 지도자들인 우리는 예수의 길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가? 아니면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가? 아예 그 길로 작정하고 접어든 어리석고 불행한 모습은 없는가?

어쩌면 거기에 상당수의 영적 지도자들도 '나라 사랑'이라는 간판을 걸고 권력자에 가까이 다가서고 아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사고의 중심은 '이긴 자가 곧 내 편'이라는 철저한 실용적 현실주의이다.

세상으로부터 세속화와 물질주의의 극단에 바로 교회와 영적 지도자들이 서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겉으로는 예수의 이야기를 하는 데, 속으로 닮아가는 것은 세속적인 정치 권력자가 아니던가? 그것이 반복되면, 정치 권력자의 몰락처럼, 어느 순간에 우리 영적 지도자들도 추락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지금 추락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아니다'라고,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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