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째 개혁으로!'

'뿌리째 개혁으로!'

[ 논설위원 칼럼 ]

박희종 목사
2017년 01월 03일(화) 14:37

긴긴 겨울밤을 보내며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이다. 동방 원정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와 '팍스 로마나'를 확립하고 원로원에서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당한다. 이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명한 한 마디의 말을 하고 죽는다.

"브루투스, 너마저!" 사실 브루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옛 애인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다. 그렇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옛 애인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생각하여, 죽음의 고비에서도 살려주었고 출세 가도를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그러한 브루투스가 자기에게 칼을 겨누었을 때, 얼마나 배신감이 가득했으면 그 절박한 상황에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외마디를 남기고 죽었을까?

작년 한 해는 우리들에게 아마도 잊지 못할 배신감으로 가득했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국가와 결혼했고, 친인척을 멀리했으니 부정과 부패, 적어도 친인척 비리로 얼룩진 추태만은 없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었다. 역대의 다른 지도자와는 다른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줄 믿었다. 그런데 그 꿈도 사라졌다. 꿈이 사라져버린 그 자리에서 2060년 전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침을 회고하면서, 내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다. "박근혜, 너마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로마 병정들에 의해서 희롱을 당하시던 운명의 순간에도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간구하시던 사랑의 주님께서, 얼마나 배신감이 컸으면 가롯 유다에게는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다'고 말씀하셨을까? 그 말씀 속에는 아마도 3년 동안이나 제자 노릇했던 "가롯 유다, 너마저!"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신학교 시절부터 롤 모델로 삼아 설교 원고도 표절해 보았고, 목소리나 제스처까지도 모방했던 선배 목사들이 말년에 그리고 은퇴를 하면서 구설수에 오르고 줄줄이 손가락질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함을 느낀다. "선배 목사, 당신들마저!"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 목사들이 이 시대의 동역자만이 아니라 목회 현장의 교인들로부터 듣는 한숨 섞인 통한이다. "우리 목사님마저!"

그렇다면 이런 배신감과 원망과 통한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믿은 것은 우리들의 잘못이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일 뿐이지,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를 원년으로 삼아, 실수로라도 우리를 믿어준 사람들에게 배신감이 들지 않도록 다시 '거룩'의 옷을 입고, 그 옷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다시 뿌리는 출발이 되어야 한다.

공화정을 꿈꾸던 로마의 사상가였던 키케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동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거목은 쓰러뜨렸지만 뿌리는 그대로일세." 공화정의 개혁을 펴지 못하고 독재로 향하고 있는 조국을 바라보면서 흘린 눈물의 외침이다.

거목이 사라져도 제도가 변하지 않으면, 교회도 국가도 발전할 수가 없다. 배신감에 손가락질 받던 교회나 국가의 지도자가 쓰러져도 뿌리 채 개혁되지 않으면 진정한 개혁이 아니다. 교회의 죄는 언제나 민족의 죄로 연결된다. 이제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나마저!"라는 배신의 화살을 맞기 전에 거룩을 향하여 뿌리째 개혁되는 한 해를 출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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