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동혜창/ 잊힐 권리

연지동혜창/ 잊힐 권리

[ 연지동혜창 ]

안홍철 목사
2016년 04월 12일(화) 15:14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가 최근 주요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012년 4월 18일자 본보(2846호) 데스크 창에서 제가 '잊혀질 권리'라고 표기하며 쓴 칼럼이 있었는데, 최근 '잊히다'는 피동사이기 때문에 여기에 또 피동의 뜻을 나타내는 접요사 '~어지~'를 붙이는 것은 어법에 맞지 않다 하여 '잊힐 권리'로 표기를 통일했다고 합니다.

잊힐 권리란 인터넷 사이트와 SNS 등에 올라와 있는 자신과 관련된 각종 정보의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보도된 시점이 오래된 이른바 '묵은 기사'가 인터넷에서 지속적으로 '퍼나르기'되면서 독자의 관심과 기억 속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져 가던 기사가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통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군에서 아들이 자살했는데, 신문에 '군 의문사 의혹'제하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아들 이름이 익명이지만 기사를 볼 때마다 부모는 아픈 기억이 되살아난다며 기사 삭제를 요청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 연예인은 과거 젊은 시절 불미스런 일로 구속된 바 있는데 이제 수십년이 흘러 "가정을 이루고 손자를 볼 나이가 됐는데 여전히 주홍글씨로 남아있다"며 삭제를 요청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언론계는 사실 보도로 문제가 없는 경우, 기사화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관련자 요구대로 무조건 기사를 삭제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언론 고유의 역할인 사회감시비판기능과 개인의 프라이버시 요구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달 25일 자기 게시물, 즉 자신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나 동영상은 본인이 요청할 경우 사실상 삭제할 수 있다는 시안을 내놨습니다. '공익'에 위반되지 않는 한 게시물 관리자나 검색사업자는 그 요청에 따라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핵심을 비켜갔다는 지적의 소리가 높습니다. 정작 대중의 관심은 이번 시안에선 다루지 않은 '자기 게시물'이 아닌 '제삼자가 자신을 언급한 게시물'입니다. 사생활을 침해하는 게시물은 사실 제삼자 게시물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여기에 더 어려운 문제는 삭제를 거부할 수 있는 '공익의 판단 기준과 법적 근거'를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것입니다.

17세기 미국 식민 시대 북부 뉴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 나다니엘 호손의 장편소설, 주홍글씨. 유부녀 헤스터 프린과 마을의 청년 목사 딤즈데일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 마을은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없는 가운데 여인이 임신하여 출산을 했으니 엄격한 청교도 계율이 지배하던 시대에 그녀는 끔찍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가슴에 간통(Adultery)의 머릿글자 'A'를 수놓은 주홍색 낙인을 달고 살아야 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녀는 끝내 상대가 누구였는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나머지 삶을 이웃에 대한 봉사와, 속죄를 통해 얻은 행복감 속에서 생애를 마치는 반면, 회개하고 고백할 기회를 놓친 딤즈데일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 쇠약해져 죽고 맙니다.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도 속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산 여인과 주홍글씨는 몸에 숨겼지만 엄청난 양심의 가책으로 스스로 파멸하고 만 젊은 성직자의 삶을 바라보며 잊힐 권리에 대한 논쟁에 앞서 하나님 앞에(Coram Deo) 온전하게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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