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턴프레스 앞의 세 개의 조각상

헌팅턴프레스 앞의 세 개의 조각상

[ 논설위원 칼럼 ] 논설위원칼럼

이창연 장로
2015년 04월 06일(월) 18:03

며칠 전 만해도 꽃이 필 것 같지 않던 응봉산에 봄소식이 왔다. 서울에서 제일 먼저 봄이 찾아온다는 응봉산에 개나리가 피기 시작했다. 성수대교를 지나면서 보면 활짝 핀 개나리가 봄소식을 알리고 있다. 이렇게 계절의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인생의 봄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부활의 아침! 골고다 산 그 높은 언덕 오르시며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고통을 당하신 주님, 못 박히신 손과 발, 상하신 머리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생각하며 아주 작은 일에도 억울해하고 분노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부활의 아침마다 늘 회개한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은 때늦은 깨우침이다. 우리들이 지은 죄로 인해 조롱과 치욕에 쌓여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주님이 걸어가신 그 고난의 길을 뒤따라가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때 그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의 손목과 발목에 내려친 망치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죄를 찢고 원수 맺힌 것도 찢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크리스찬이 세상을 향해 화해의 손을 내밀며 위로의 목소리, 평화의 걸음을 회복시켜야한다. 영적인 호흡인 기도를 멈추지 않게 하고 우리의 영혼이 목마르지 않도록 주님께 매달려야한다.

TV를 보다 또래 남자가 나오면 놀라운 것이라도 발견했다는 듯 아내에게 묻곤 했다. "나도 저 사람 만큼이나 늙어 보여?" 아내는 "저 정도는 아닌데…"라고 얼버무렸다. 이런 문답이 몇 차례 거듭되면서 아내의 대꾸가 다분히 위로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로데오 거리를 지나 가다가 쇼 윈도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내 얼굴이 적어도 나이만큼은 늙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온 얼굴에 세월과 피곤의 더께가 덕지덕지 앉은 것 같다. 황지우의 시처럼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이 말이 실감난다. 예순, 일흔을 넘긴 사람을 보면 참 지겹게도 오래 산다고 경멸 할 때도 있었는데 정작 이냥저냥 살다보니 예순 줄 후반에 들어섰다.

육십 대의 삶은 앙코르인생이다.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대 위에 다시 서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죽기 전에 멋진 죽음의 준비도 해야 할 것 같다. 눈 깜짝할 사이 오십을 넘어 육십 줄 그것도 후반에 들어서고 보니, 세월의 빠름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림을 느낀다.

지난 80년대 초반 미국에 갔을 때 꼭 들르고 싶은 곳이 헌팅턴에 있는 '헌팅턴 프레스'라는 신문사였다. 왜 가려고 했나? 이 건물 앞에 세 개의 조각상이 나란히 서있는데 그걸 보려고 갔다.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Globe)를 껴안고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지구본 위에 당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 밑에 깔려 살려 달라고 부르짖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이라는 시간으로 웃는 자도 있고 우는 자도 있다. 글로브를 껴안고 있는 자는 시간을 아끼고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글로브 위에 서있는 모습은 시간과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이며, 마지막 글로브 밑에 깔려있는 모습은 시간을 무시하다가 실패하거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헌팅턴 프레스' 신문사는 항상 흐르는 시간 속에서 최후의 인간들이 후회하지 않도록 깨우쳐주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그런 조각상을 세웠다고 한다. 적당히 보내고 다음에 잘하지 하다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다. 시간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요단강 건너가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살기를 기도한다.

이창연 장로 / 소망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