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사건 '성탄절'

혁명적 사건 '성탄절'

[ 논설위원 칼럼 ] 논설위원 칼럼

김지철 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12월 20일(화) 18:12

예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 아니 심장이 마구 뛴다. 도대체 저런 분이 어디 있을까?
 
예수님은 한 마디로 말하면 거침이 없는 분이시다. 그의 삶은 자유 그 자체다. 그래서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아주 파격적이어서 가치를 뒤집어놓는 역전의 드라마와도 같다. 거대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인간의 오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혁명적 사건이 아닌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성령의 잉태라는 초유의 사건은 그의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충격이었다. 짐승의 똥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구유간에서의 탄생은 결코 미화된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다. 왕중의 왕이 오셨는데 그분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들에서 양치는 비천한 목자들이었다. 다만 예외적인 것이 있었다면 별을 보며 미래를 예언하는 동방의 박사들의 반가운 방문이었다. 그러나 이 방문은 당시 정치 권력자인 헤롯의 불혈같은 진노에 맞닥뜨린다. 수많은 어린 생명의 살육이라는 끔찍하고 암울한 사건을 동반했다. 이것 또한 충격중의 충격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실제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님의 선포, 곧 그분의 삶 자체가 엄청난 도전적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정치적 왕권에 대한 도전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더 이상 인간의 권력자가 다스리는 나라는 유효하지 않음을 선포하는 반란과 구데타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겠다는 혁명 선언같이 보인다. 정치 권력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메시지와 행동을 정탐하면서 시비를 건 이유일 것이다.
 
예수님은 왜 헤롯을 향해 '여우같은 자'(눅 13,32)라고 부르셨을까? 헤롯과 빌라도는 권력다툼으로 서로 으르렁거렸으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몰아갈 때에는 친구처럼 합작을 하고 있었다(눅 23,12). 그렇다면 권력자들만 그랬는가?
 
당시에 무엇인가 가진 자들, 아니 돈과 재물을 갖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지는 사회 불순세력의 언동과도 같이 극단적으로 다가온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그러나 화 있을 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가"(눅6:24)
 
이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예수님은 스스로 고난의 화를 자초하신 것처럼 보인다. 가진 자들과 무엇인가 휘두를 수 있는 힘 있는 자들을 다 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은 어떠한가? 더욱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셨다. 율법의 규정이라는 허울만 붙잡으며 속이 썩어 있는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일갈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장 : 7개의 저주 말씀).
 
그러면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뒤따르고 있는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는 어떠한가? 정치, 경제, 종교 세력과 거리를 둔 예수님과는 달리 우리는 너무 가까이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변화와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교회와 목회자가 가장 먼저 변화와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고뇌하면서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몸부림치는 교회와 목회자를 찾고 계신다. 이런 영적인 지도자들이 아직도 이 땅 곳곳에 숨어 있기에 교회가 이만큼 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에 비추어 다시금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본다.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