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2~17일

12월12~17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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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07일(수) 17:04

제목: 희망의 전율(2)-바울의 이야기
본문: 갈4:4-7
찬송가: 105(구 105)
 
성탄절을 앞둔 대림절 절기이다. 하나님께서 왜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을까?
 
바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크게 두가지로 요약한다.
 
첫째,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범죄한 인간에게 주신 최소한의 요구였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율법아래 태어나셨다. 그런데 그 분은 율법을 범하지 않으셨다. 인간은 율법을 범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한 그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속량했다는 말은 값을 지불했다는 말이다.

로마 시대에는 노예가 많았다. 어떤 선한 부자가 노예 시장에서 한 노예를 샀다. 그런데 이 선한 주인은 노예를 부려먹기 위해 산 것이 아니었다. 자유를 주기 위하여 값을 지불한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선한 주인과도 같다. 죄의 결과로 '사망'이라는 값을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지불해주신 것이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인간의 죄의 값을 지불할 능력이 있으신 분이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값을 속량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다.
 
둘째,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만을 속량하신 것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내가 누구와 친하다는 정도의 말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대통령을 안다 또는 내가 대통령과 친분이 있다는 말과 내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말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속량하신 것은 바로 우리를 아들로 입양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특권이요 축복인 것이다.
 
과거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땅에 오사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친밀한 관계가 된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고 그의 유업을 받게 되었다.
 
대림절 주님의 오심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탄생이 이런 엄청난 의미와 축복이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며 오늘도 승리하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사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대림절 절기에 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윤석호목사 / 동춘교회

 


 

화-기다림의 신앙
본문: 눅2:25-35
찬송가: 104(구 104)
 
영국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글에서 인간의 삶의 특징을 기다림으로 정의했다. 사람은 어렸을 때는 부모를 기다리고 성장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나이가 들어서는 자식을 기다리며 산다. 기다림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정서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속에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감정이 담겨 있다. 기독교의 특징,복음의 특징,신구약의 특징도 기다림이다. 구약은 창세기 3장 15절 '여자 네 후손이 구세주로 올 것'이 주제이며 신약은 구세주가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승리하시고 승천하셔서 다시오시마 하신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본문에 시므온이란 사람이 살았던 시대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에 위로가 필요한 시대였다. 말라기 이후 4백년 동안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영적 암흑의 시대였다. 시므온은 시대의 필요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가 이스라엘 위에 임하시기를,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해주실 그 날을 간절히 기다렸다. 시므온이 기다린 위로는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죄중에 버려진 자의 구원과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과 민족과 세계를 진정으로 위로해 주실 수 있다. 그 분은 우리의 슬픔과 질고와 허물을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이뤄질 때까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서로 위로하며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다린다'는 말인 '프로스데코마이'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주님을 기다리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꿈과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둘째는 '찾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날 구원하신 주님을 찾아야 한다. 진리를 찾고 선한 방법과 의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구원받을 영혼,동역자들을 찾아야 한다. 셋째는 '용납한다. 받아들인다. 환영한다. 영접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부어주시는 은혜도 용납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다. 환영하고 영접하는 자라야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주의 위로와 축복을 주실 때에 한 가지 보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그릇이 깨끗한 그릇인가 아닌가이다. 시므온은 '성령이 그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애를 쓰는 자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축복을 허락해 주신다.
 
지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영적성숙을 갖는 대림절이다. 재림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근신하며 깨어 기다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오늘의 기도 >
언제나 변함없이 위로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시대, 소망이 없다고 하는 시대에 하나님만이 우리의 위로자이심을 고백합니다. 어떤 어려움 속 에서도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만영목사 / 예수비전교회

 


 

수-우리 온 몸은 밝은가?
본문: 눅 11:33-36
찬송가: 412(구 469)
 
어릴 적 두더지를 잡아 땅 위에다 올려놓으면 두더지가 빛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두더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눈이 거의 퇴화되어 쓰지 못한다. 어둠 속에서만 활동하다 보니 눈이 아예 필요없게 된 것이다. 빛을 싫어하다 보니 눈이 제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우리가 빛의 반대방향으로 가다보면 어둠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빛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런 영적 질병 상태 속에 깊숙이 빠지게 되면,하나님의 것보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진다. 영적 질병 상태에서 내 마음은 어둠에 짓눌려 마치 가위눌린 사람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잘 움직여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얼마든지 어둠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빛 되신 하나님의 아들딸로 불러주셨기 때문이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바로 빛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은혜로운 빛,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주신다. 바울이 다메섹 길 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영적 병을 앓고 있던 사울이 예수님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바울로 치료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흑암 가운데, 망 가운데 행하는 우리들에게 빛을 보여 주신다.(사 9:2) 즉 우리가 삶 속에서 당하는 힘든 문제,절망의 문제를 주님께서 맡아 주시고,빛으로 임재해 주셔서 주님의 빛으로 비추어 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도 하나님처럼 빛으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죄악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비추면서 그들을 옳은 길로 이끄는 빛이다. 내가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고 그 빛에 순종할 때,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나를 통해 나타난다. 부드러운 눈빛을 가지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는 행동에서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자기 안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잘 보아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빛은 하나님이 주신 빛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 속에 있는 빛을 환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순종하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건강하고 신실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지배하고 그 말씀 가운데 복되게 사는 은총을 주신다. 세상의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삶으로 더욱 큰 복을 받으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우리로 하여금 어둠뿐인 세상 속에서 빛된 자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 채우사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잘 인도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택현 목사 / 광주서남교회

 


 

목-시간의 걸음
본문: 마태복음 25장 1--13절
찬송가:  104장(구 104장)
 
인생이란 모든 자기 선택의 총합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끊임없는 과정이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열고 닫는 문들이 우리 인생을 결정한다. 사소한 결정이 나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을 수도 있다.
 
만약에 시간에게 걸음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프리드리히 쉴러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의 걸음은 세 가지이다. 미래는 머뭇거리며 오고,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며,과거는 영원히 멈춰 서 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처녀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기쁨이 넘치는 축하의 자리에 들어 갔지만,다섯 처녀는 기회를 놓쳐 들어갈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무엇이 이들을 갈라 놓은 것인가.
 
오늘 말씀의 결론은 13절인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비유처럼 갑자기 오는 것이며 기회를 잡지 못하면 닫힌 문을 다시 열 수 없다는 것이다. 열 사람이 선택받았지만,다섯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주어진 기회를 맞는 자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이들은 새 신랑과 함께 기쁨의 자리에 참여할 신부의 들러리로 선택되는 큰 특권을 얻었지만,이들에게 언제 올 지 알 수 없는 기다림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 사람의 인품이 드러난다. 아무리 확실한 보장도 시간이 지나면 반신반의 하게 되며 기다림의 의미가 약해지고,그러면 확신보다는 의심이 오고,준비가 소홀하게 된다.
 
그렇지만 깨어서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어떤 순간이 나의 일생에서 결정적인 것인지,어떤 사건이 내 인생을 바꾸게 되는 것인지,그리고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나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와 자신을 믿고 지금 최선을 다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준비하며 깨어 있지 못한 다섯 사람은 화살처럼 날아가는 이 순간에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신랑과 함께 약속된 자리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들은 늦게 오는 신랑을 불평하고 머뭇거리는 시간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사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주어진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나름의 판단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대중의 결정을 따르기 때문에 다섯 사람과 함께 결정적인 순간에 그 현장에서 버림 받게 된 것이다.
 
우리는 내일에 희망을 걸지만 지금 이 순간에 행동하지 않으면 날아가는 화살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영화 ‘쿵푸 팬다’에 나오는 이야기를 함께 생각하자.시푸(사부)가 학생인 팬더에게 해주는 멋진 대사 말이다.
 
"과거는 역사,미래는 신비,그리고 이 순간은 선물,그러기에 지금의 이 순간을 현재,선물(Present)이라고 부르는 거야.” 

<오늘의 기도>
자기 자신을 믿고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하시고,지혜로운 다섯 사람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을 준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덕주목사 / 한들출판사 대표


금- 말(馬)과 경주할 수 있는 믿음
본문 : 렘 12:1~6
찬송가 325장(구359장)
 
믿음의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실의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여도 아무 열매가 없을 때,또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겐 고난이 따르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안과 형통하는 삶이 보여질 때이다.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이들을 진멸하고 잠시 동안은 승리의 기쁨을 누렸지만 이세벨의 위협을 받고는 호렙산으로 도망하여 절망에 빠져 부르짖으며 투정을 부린 때도 있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오늘 본문 말씀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고향 아나돗에서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살해하려고 하는 음모를 알고 허탈해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하여도 돌아오는 것은 핍박과 조롱뿐이고 심지어 가족들과 고향 사람들까지 자신을 해치려함을 알고 하나님께 묻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질문한 것과 같이 우리들도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악인은 형통하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들이 잘됩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바로 5절과 6절이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사람들과 같이 걸어도 피곤해지는 사람이 어찌 전쟁때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어떻게 살아 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요단강이 범람하는 전쟁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말과 경주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고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환란을 통하여 이 믿음의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어려울 때 일수록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믿음으로 훈련을 잘 통과하여 너에게 준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바르게 정직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큰 환란에서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다. 우리는 환란의 때에 하나님을 거역하며 이중적인 방법으로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고 시험받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는 때인줄 알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불합리한 세사에서도 낙심치 않고 주님만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라 힘의 법칙으로 움직인다 하여도 더욱 주님만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셔서 어떠한 환란에서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민준기목사/ 성심교회


토-주님과 함께              
본문: 마가복음 8:27-33            
찬송가: 80장(구 101)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할 때에는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기였으며,주님의 메시야적 구원의 역사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전략적이고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우리가 삶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동행하도록 결단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먼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살펴보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알아보시려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어 보셨다. 제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라고,엘리야,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다.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믿음생활의 형태와 교회생활의 형태가 현저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에 예수님을 단지 선구자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예수님이 만약에 메시야라 하더라도 죽음 후에 다시 부활이 없었다면 죽음을 향한 구속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대해서 매우 정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인자(人子)'라는 보다 명확한 말씀을 사용하시면서 대답해 주셨다. 진짜 메시야의 사역은 고난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역설적인 말씀은 즉시 베드로에게는 영적인 믿음을 사라지게 했다.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32절)
 
이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베드로가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후에 예수님의 뜻을 가로막고 죽임을 당하시는 메시야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고백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베드로는 그의 고백에서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확실히 말했으나,예수님은 "사단아"라고 꾸짖으셨다. 예수님은 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는 축복까지 하셨지만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못하는 베드로를 사정없이 책망하셨다. 베드로는 자기 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잊었다. 주님을 생각하는 듯 했지만 십자가의 구속을 말리고 있었으며 부활의 영광을 말리고 있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척 하면서 예수님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는가? 오늘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성도로 살아가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연말의 분주함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베드로를 통하여 주시는 교훈을 받아 영적 위기에서 건짐받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방법을 깨닫는 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정선목사 / 대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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