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그 오만함과 당당함을 넘어

용서, 그 오만함과 당당함을 넘어

[ 데스크창 ]

안홍철 기자 hcahn@pckworld.com
2011년 11월 18일(금) 13:58
"학교 뒷산 산책하다,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 쓴 소나무,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한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소나무,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황지우 시인의 시 '소나무에 대한 예배' 전문입니다.
 
황지우 시인의 지인인 김용택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이 오만함과 당당함이라니,황지우 대단하다. 시인이 무릇 이래야 하느니. 삶이여,오 날마다 진저리쳐지는 살아있음의 모욕이여. 눈 들어 앞 산 오래된 소나무를 바라본다. 그리고 휘어진 내 삶의 한 구석을 한겨울의 솔바람 소리로 쭈욱 펴며 쌓인 눈을 턴다"고 그 느낌을 공감했습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가진 자존심과 품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상대를 받아 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강한 울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에 예배란 시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용서란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받으며 상대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살아갑니까? 성경 말씀을 보고 듣고 마음에 새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내게 손해를 끼친 상대에 대해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지는 않은지요?
 
본래 사람을 용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포용은 예수님이 원조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닮아가기를 자처하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첫번째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여,저들의 죄를 사해 주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대인들이요 십자가에 못박고 제비뽑은 로마 군병들입니다. 또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함성을 질렀던 군중과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이들 모두가 다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저들은 우리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받을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
 
시인의 용서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지만,예수님의 용서는 그것을 넘어 '죽음도 불사하고'란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양쪽의 강도들이 저주와 조롱을 하고 있는 중에도 주님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자신의 죄나 불의함 때문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홀로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빈 것입니다. 오만함과 당당함을 넘어서 죽음도 불사할 만큼의 희생과 헌신이 내포돼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는 용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자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못해 서로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불신이 가득해지면 상대를 미워하고 시기하며,심지어 저주하다가 갖은 방법으로 상처를 줍니다. 결국 편을 가르고 돌아올 수 없는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서로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기다림의 계절,대림절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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