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책상

루터의 책상

[ 데스크창 ]

안홍철 기자 hcahn@pckworld.com
2011년 10월 27일(목) 09:57
1520년대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그가 살던 작센(Sachsen)주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는 동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이나 십계명, 사도신경, 심지어 주기도문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했던 루터로서는 충격이었고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성도들을 교육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교회 교육용 교재를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가 교회 순방을 마침과 동시에 출판한 것이 교회교육 교재의 고전으로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처럼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한 몫 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손으로 직접 필사하면 3년 정도 걸리던 성경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성경이 출판되자 시간이 훨씬 단축되어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도 인쇄되어 전 유럽에 퍼져 종교개혁을 확산시키게 됩니다.
 
말씀은 인류 생성의 기본원리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는 말씀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말의 등장은 커뮤니케이션의 첫 혁명이고, 글의 등장은 커뮤니케이션의 두 번째 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있는 곳에 개혁이 있었습니다.
 
매체 발전의 역사를 통해 보면 인류는 문자, 인쇄술, 전신(라디오, 텔레비전), 컴퓨터(디지털)라는 네 가지의 기술적 발명을 통해 매체를 발전시켜 왔으며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구전에서 필사로, 필사에서 인쇄로, 이후 인쇄매체와 함께 방송, 인터넷의 등장으로 현재는 디지털 매체시대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일주일 간 독일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발자취를 밟아보는 뜻 깊은 여행이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곳은 아이제나흐(Eisenach)입니다. 물론 루터의 생가가 있는 아이슬레벤(Eisleben)도 있지만 아이제나흐는 에르푸르트(Erfurt) 서쪽 숲 속에 위치한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도시로서, 작곡가 요한 세바스챤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서 루터는 청소년시절을 보냈고, 1521년 5월 26일 보름스 종교재판에서 파문이 결정되자 이곳에 위치한 바르트부르크 성(Die Wartburg)에 10개월 간 은둔하며 신약성경 전체를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합니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경치가 너무 좋아 11세기, 영주가 "기다려라(Wart), 성(Burg)을 지으마!"라고 말한 데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루터는 종종 이 도시를 회상하며 "오 나의 사랑스런 도시여!"라고 했다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이 가시겠죠?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 성 내에 루터가 성경을 번역한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낡고 자그마한 책상, 어두운 불 빛 속에서 파문의 아픔을 삭이며 성경 번역의 열정을 불태워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의 종교개혁 기틀을 세웠다고 생각하자 숨이 멈출 것 같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루터의 그 책상을 생각하면 문득 우리가 사용하는 책상의 크기가 너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책상에 걸맞는 일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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