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목숨 깎아 어디에 쓰고 있는가?"

"지금 내 목숨 깎아 어디에 쓰고 있는가?"

[ 논설위원 칼럼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2월 10일(목) 15:05


에스키모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늑대 사냥을 한다고 한다. 먼저, 날카로운 칼날에 짐승의 피를 발라, 그것이 얼 때까지 놓아둔다. 그 위에 다시 피를 발라 얼리고 계속 그 일을 반복해서 피가 완전히 칼날을 뒤덮을 때까지 바르고 얼린다.
 
다음은 그 칼을 하늘을 향해 세워서 땅에 고정시킨다. 이제 늑대는 예민한 코로 냄새의 근원을 찾아 얼어있는 신선한 피를 핥기 시작한다. 늑대는 점차 더 빠르고 맹렬히 핥기를 거듭해 마침내 날카로운 칼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미 식욕은 강렬해져 자신이 날카로운 칼끝을 핥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흘린 피로 그칠 줄 모르는 갈증을 채우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결국 늑대는 주검으로 남는다.
 
우리는 지금 건국이래, 아니 하나님이 이 땅의 흑암을 걷으신 이후 무한한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장로가 대통령이요, 국회에서는 조찬기도회가 번듯하게 열리고, 삼부의 요직마다 기독교인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런데 나라는 더욱 어려워지고 탄식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조류독감I,구제역으로 동물들은 살처분을 당하고 기상이변이 계속되며 남북관계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누림은 있지만 마음은 공허하고 이제는 왠지 불안하다는 자조섞인 말들이 낯설지 않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 것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교회도 어느새 세상에 동화되어 예전에는 가슴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시 되고 말았다.
 
이제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무미건조해진 채 잊혀지고 있으며 교회 내에서도 팽창주의와 편의주의, 안일함으로 대 사회적 의무를 말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된 지 오래다.
 
믿음은 골동품이요, 순종은 마음여린 사람들의 몫이요, 믿음은 두려움의 산물이며 경건의 능력은 자주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버렸고 신앙의 의식들은 삶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하나하나 양보하고 타협하다보니 세상에 도리어 길들여져 영원한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그래서 어느 동료 목사가 하는 말이 종종 생각난다. '한국교회는 이제 심지가 거의 다 타들어간 시한폭탄과 같다'는. 그럼 이대로 터지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작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 끝이라도 잡고 있어야 할까? 하나님의 섭리와 선하신 뜻은 무엇일까? 지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고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쓰임 받는, 또 쓰임 받겠다 준비하는 분들, 고귀함에 자신을 감추고 있는 분들은 과연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7천 명과 같은 사람들일까?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바들바들 떨고 있다. 하지만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나침반은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지가 살아있음이 분명하기에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옳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만일 그 끝이 불안한 떨림을 멈춘 채 어느 한 쪽만을 가리키며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나침반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현실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매 순간마다 떨림으로 만나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지금 내 목숨 깎아 어디에 쓰고 있는가?'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2)

최영업
목사ㆍ일산신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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