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

[ 논설위원 칼럼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10월 19일(화) 19:20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하나. 학교의 프로그램을 따라 산행을 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게 더 어려운지 산을 타는 게 더 어려운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단다. 우연찮게 동행 아닌 동행을 하며 아이들의 논쟁에 귀 기울이고 있던, 한 산 사나이가 그 새를 못 참고 질문했단다. "그래, 어느 것이 더 어려운데…?"

"그야 당연히 산을 타는 게 더 어렵죠! 공부는 하는 척할 수도 있지만 산은 타는 척할 수 없잖아요!"
얼마전 '행복전도사'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한 유명 인사가 배우자와 함께 목숨을 끊은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행복은 셀프(Self)예요. 우리가 셀프 점에 앉아 있으면 물 한 잔 안 갖다 주잖아요. 행복은 내가 찾는 거예요!" 이것이 아마 그녀가 행복전도사로 이야기한 내용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토록 열정을 다해 행복을 외치던 그녀도 '7백가지 통증' 앞에선 행복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니, 그것도 이승에서의 마지막 행복이란 게 사랑하는 남편과 떠나는 영원의 길이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자신의 인생이 그야말로 척하는 인생, 가진 척, 많이 알고 있는 척, 아니 열심히 살아가는 척 적어도 평범한 소시민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는 것을 말이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또 한 분의 유명 인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최근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며 세례를 받고,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쓰신 이어령교수다. 그 분은 오래 전에 '나를 찾는 술래잡기'라는 책을 통해서 "어려서는 남을 찾는 술래잡기를 했고, 지금은 나를 찾는 술래잡기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남을 찾는 술래잡기도, 나를 찾는 술래잡기도 아닌, 하나님을 찾는 술래잡기로의 변신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교토에서 먹고 살아가기 위해(?) 쌀 한 자루를 메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그리고 마치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이, 쌀 자루를 내려놓으며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무신론자의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그 때 이미 "무신론자도 기도한다!"는 모순 어법을 통해 영성으로의 길목에 발을 내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실의 계절이다. 나는 이 결실의 계절에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아니 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 나는 지금 여기에서 누구인가?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

'행복전도사'가 '7백가지 통증'이라고 표현한 '홍반성 루프스'라는 질병, 외부로부터의 나 자신을 방어하는 면역체계가 이상을 일으켜 오히려 자신의 인체를 공격한다니, 아이러니하게도 결국은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자, 지금, 바로 여기에서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자! 산은 타는 척할 수도 없고 삶도 사는 척할 수도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누군가가 산을 대신 타줄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 누구도 대신 대답해 줄 수 없다.

"하버드대생 2백68명, 72년간 인생 추적…" 그리고 그 결과물인 '행복의 조건'이란 책에서 연구를 주관한 조지 베일런트교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결론에 다시금 질문하고 싶다. "행복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일서 4:7~11)

홍성호 / 목사ㆍ순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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