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차가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 땅끝에서온편지 ] <3> '거지'에도 서열이 있다 폴란드 김상칠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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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3월 11일(목) 10:32
   
▲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 폴란드 노숙자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일자리를 잃은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오늘도 굶주림에 시달리며 거리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계속되기를 기도한다.

폴란드인들은 크라쿠프를 가리켜 폴란드안의 또 다른 왕국이라고 말한다. 옛 수도였던 크라쿠프는 귀족들을 위한 도시로, 도시 내에 평민이 거주할 수 없는 지역을 지정했었다. 평민들을 위해서는 크라쿠프 외곽에 노바후타(새로운 도시)라는 거주지를 만들었고, 마부 하녀를 비롯한 평민들은 매일 크라쿠프로 출퇴근을 했었다고 한다.

2002년에 시작한 선교사역 중 집시와 노숙자들을 위한 거리사역이 있다.
대부분 노숙자 쉼터를 거부하고 중앙역 지하나 폐수가 흐르는 하수구 곁에서 잠을 청하는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 이들과 일자리를 놓치고 실업자가 된 이들을 위해 점심을 제공하고, 겨울에는 침낭을 나누어 주는 일이다.

처음 급식사역을 시작할 때는 점심 한 끼를 나누어 주는데 3~4시간이 소요되었다. 영하 15~20도를 내려가는 날씨에 오랜 시간을 야외에서 서있는 고통은 참을 수 없을만큼 힘들었다. 이들의 주식인 간단한 빵과 음료수를 나누어 주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된 이유는 급식시간이 되면 모여드는 노숙자들이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정작 음식은 받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모두 흩어지면 급식을 마치고 우리도 돌아올 수 있을텐데 몇 걸음쯤 떨어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두고 돌아올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우리가 음식을 들고 찾아가 나누어 주면 절대로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동양인에게 음식을 얻어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먼저 음식을 받아간 노숙자들은 크라쿠프의 외곽이나 다른 도시에서 온 이들이고 주위를 맴돌며 우리를 괴롭힌(?) 이들은 크라쿠프에 살고 있는 노숙자들이었다. 이들 세계에도 귀족과 평민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서열을 따진다는 것이다. 거지에도 귀족과 평민이 나뉘어져 있단다.

8년이 지난 지금은 산처럼 높던 자존심을 버리고 한 식구가 되어 동양인이라며 무시했던 나에게 "줄 좀 제대로 서라"는 꾸지람을 들어도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거지 대장으로서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고마운 것은 음식이 부족할 때에 서로 다투지 않고 양보하는 마음들이다. 비록 적은 양의 음식을 받아도 한결같이 "부크푸아치(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헌옷을 모아 나눌 때도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은 아무리 새 것이라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놓고 간다. 간혹 보이지 않아 궁금해 하던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좌판을 놓고 작은 사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 큰 기쁨을 얻기도 한다. 또한 이들에게 음식준비에 보태라며 동전 몇 닢을 건네받을 때는 어느 헌금보다도 큰 것으로 여겨 거절하지 않고 받는다.

거리사역을 하면서 때로는 딜레마에 봉착할 때도 있다. 지난 번에 준비한 음식이 부족해서 이번에는 많은 양을 준비했는데 노숙자가 예상외로 적게 모여 준비한 음식을 버리게 되기도 하고, 반면에 매번 많은 노숙자들이 몰려들어 정신없이 배식을 하고난 후에는 한편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노숙자 사역을 하면서도 하루 빨리 거리에 노숙자들이 없어져야 진정 좋은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들이 노숙자가 되는 많은 이유 중 한 가지를 들면, 폴란드가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유럽연합에 속하면서 서유럽의 기업들이 속속 폴란드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동안 폴란드에서의 외국어는 독일어나 러시아어였는데 이제는 영어를 하지 않으면 직장에서 퇴출을 당하게 되었다.

4~50대에게 새로운 언어와 컴퓨터를 습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새로운 직장을 얻지 못하면 세금을 낼 수 없고 연금 혜택에서 제외되고 만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집을 떠난 이들이 돌아갈 길이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복지국가란, 제도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천국일지 몰라도 제도 밖으로 밀려난 사람에게는 냉정한 지옥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음식은 하늘이다. 부자라고 다 가질 수 없고 가난하다고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어느 누구도 배고픔을 면할 권리는 가지고 태어났건만 오늘도 굶주림에 시달리며 영하의 날씨에 신문지를 이불 삼아 잠을 청하는 이웃이 있다. 주님께서 이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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