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나고 섬에서 자란 울릉도 선교 역사의 산증인

섬에서 나고 섬에서 자란 울릉도 선교 역사의 산증인

[ 피플 ] 울릉동광교회 원로 오규환목사

정보미 기자 jbm@pckworld.com
2009년 04월 14일(화) 18:18
【울릉도 : 정보미기자】 "1960년대엔 인구도 3만명이었고 기독교 복음화율도 40%였어요. 당시에는 먹고 사는 게 어려우니까 손바닥만한 땅도 모두 화전을 일구고 살았죠."

울릉도 선교 1백주년 역사의 산증인 오규환목사(포항노회 공로ㆍ울릉동광교회 원로)를 그의 사택에서 만났다. 울릉도에서 자라 장신대 단기신학 과정을 졸업하고 동해노회(현 포항노회)서 안수받은 뒤 지난 2003년 은퇴하기까지 총 43년을 시무했다. 그것도 울릉도에서만 말이다. 1960년대 전도사 시절엔 남양제일교회를, 1979년부터 통구미 천부제일 태하 현포 울릉동광 교회를 시무했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교회가 거의 없을 정도다. 한 교회서 두 번 시무한 적도 있었다. 울릉도는 육지와 달리 교역자가 귀한 탓이었다. 육지에서 들어온 목회자들로 인해 교회 분란이 발생하면 이를 수습하느라 '해결사'로 오 목사가 파견됐다. 울릉도 출신이라 도내 사정이 밝아 성도들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리고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둘로 나뉘게 되는 아픔 속에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꼬박 2년 동안을 매주 4시간씩 산 넘고 물 건너 교회를 오가기도 했다.

"목회 초창기에는 한 달 생활비로 보리쌀 12되를 받았어요. 그런데 15년 후에는 쌀 반가마로 늘었어요. 그만큼 주민들의 형편이 차차 나아졌다는 겁니다."

하지만 오 목사에 따르면 한때 흥왕하던 울릉도도 1959년 사라호 태풍이 불어닥치며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한 후부터 인구가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고. 또 오징어잡이 배들이 자동화기계를 들이며 한 배에 보통 30~40명이던 선원이 2~3명으로 확 줄게된 것도 주민들이 섬을 떠나게 된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래도 지난 2007년부터는 정부의 지원으로 도민들의 배삯이 5천 원으로 할인되며 다시 한 두 가정씩 회귀하고 있단다.

오 목사는 지금의 울릉동광교회 예배당을 건축할 당시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바람이 세게 불면 함석지붕이 와글와글 흔들릴 정도로 건물에 힘이 없었어요. 한번은 지붕이 날아가 남의 집 천장에 얹히기도 했어요. 재정이 없었지만 안되겠다 싶어 교회 건축을 시작했죠. 육지에 나가 전국 교회를 다니며 후원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관계 형성의 밑거름이 되서 총대를 10번 이상 했어요. 또 당시 도움을 줬던 목회자들이 울릉도에 관광을 오면 대접할 기회도 생기면서 차차 은혜를 갚아나갔죠."

울릉도는 배타고 들어오면서, 또 정이 들어 떠나기 싫어서 두 번 우는 곳이란다. 예전엔 보따리장수들이 밥을 사먹지 않고 전부 얻어먹고 다녔을 정도로 인심이 후했다. 오 목사는 후배목회자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목회하라"고 당부한다. 그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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