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살려면 '신학'이 살아야 한다

교회가 살려면 '신학'이 살아야 한다

[ 연재 ] 특별기고/한국 신학교육의 '희망찾기'< 下 >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8년 05월 07일(수) 00:00

박 창 환
목사ㆍ전 장신대 학장

 

영성교육의 맹점

예수님의 제자교육은 제자들과 3년 동안 동거하며 동고동락하며 이뤄졌다. 자신을 '배우고 닮고 따르는 자'들을 만드시려는 목적에서였다.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신령한 분이셨다. 그가 승천하신 때로부터 교회를 이루고 증인이 될 사람들이 바로 제자들이었고, 교회의 기초가 될 사도들을 기르는 일이었기에, 철저하게 자신을 닮는 교육을 실시하신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데, 우리 앞에 안 계시는 예수를 어떻게 배우고 따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철저히 훈련하여 자기를 닮은 자들을 만드시려고 노력하신 것이고, 그 노력이 주효하여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가 그리스도의 길을 성공적으로 따랐다.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는 그 사도들의 전승을 이어서 면면히 발전해 온 것이다. 즉 사도적 교회가 바로 참 교회이고, 우리는 니케아신조와 같이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한다. 그런데 오늘의 장로교신학교의 교육이 얼마나 예수를 닮게 하는 교육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학생의 수가 많은 것도 문제지만, 이들이 3년의 재학 중 교수와의 관계가 얼마나 예수와 제자의 관계를 닮아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수들은 신학적 지식만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도적 전승을 면면히 이어서 먼저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가 먼저 되고, 다음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닮은 인생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교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실연(實演)돼야 한다.

이제껏 이러한 신앙훈련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 훈련을 학생 개인의 자율에 맡기거나, 경건회 출석 강요, 매 학기 한 번 있는 특별 사경부흥 집회를 통해서 이루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것이 효과가 있었을까. 요는 교수들이 먼저 예수를 닮아야 하고, 사랑을 가지고, 사명감을 가지고, 제자들을 예수 닮은 자로 만들려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경영위주의 학교 운영

국내의 경우 한 단과 대학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천 명의 학생이 필요하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그것은 학생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즉 이들의 수업료로 학교를 경영하는 방법을 전제로 한 것이다. 교회에 목사가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통계나 계획과는 무관하게, 신학교의 경영과 그에 필요한 학생의 수를 계산하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학생을 입학시키는 것도 결국은 교직원들의 인건비와 제경비를 이들의 등록금에 의존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반성해볼 일이다.

교회는 매년 쏟아져 나오는 목사후보생을 소화할 수 없는 것이 뻔한데도, 그리고 임지가 턱없이 부족해 졸업생들 간에 혹은 목회자라도 임지가 생기면 예의도 체면도 생각할 겨를없이, 심지어는 동역자들을 중상모략하면서까지 쟁탈전을 벌인다. 이 얼마나 살벌한 상황인가 말이다. 그런 실정을 뻔히 알면서도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려는 것은 과연 응시생이 많기 때문만인가 아니면 경영을 위해서 외면하는 것인가. 이 악순환을 막을 길이 없는 실정이 된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비극이다.

신학 빈곤에서 오는 착각들

어찌 이런 상황에서도 신학교 지망생이 그리도 많은지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의 신앙이 좋거나 모두가 헌신적으로 목사가 되려고 한다고 판단하며, 박수를 치고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신학적으로 오판을 하고 있다. 종교개혁 정신을 이탈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 각각에게 '달란트'를 주셨다. 그것들이 다 하나님의 왕국 건설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농사꾼이 필요하셔서, 농사의 달란트와 사명을 주시며, 그를 거룩하게 농사꾼으로 부르셨다. 어떤 이는 손재간을 주셔서 공업으로, 어떤 사람은 법관으로, 어떤 사람은 의사로 거룩하게 부르셨다.

그런데 중세에는 헬라적 이원론 사상이 교회로 침투, 사람을 상하(上下)구조로 보고, 성직자 곧 사제들은 위에 있고, 거룩하다고 보고, 평신도는 사제 밑에 있는 자들로서 거룩하지 못하다는 식의 판단을 했다. 종교개혁은 만인사제론을 통해 이를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중세로 돌아가 성직과 세속의 소명을 차등화  시켜버렸다. 목사들도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의하면 교회에는 사도, 예언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가 있다고 했으며, 전도인과 목사는 범주를 달리했다.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이다. 의사도 법관도 장사하는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목사가 되어서 전도하겠다고 신학교로 몰려 온다. 정부의 고급 관리도 의사도 직업을 내던지고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 문을 두드린다. 목사의 범주는 따로 있다. 양을 지도하고 먹이고 기르는 특수한 직책을 가지는 것이 목사이다. 목사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맡아서 기를만한 지도력과 학력과 인격과 조건을 겸비해야 한다. 목사가 되기에는 무언가 모자라게 보이는 사람들도, 그릇된 신앙과 잘못된 지도를 받고서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됨으로,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일을 하면서, 스스로도 괴로움을 당하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과연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이미 위의 여러 조항에서 언급된 문제점들을 뒤집으면 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폐쇄된 마음을 열고 진리를 자유롭게 연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개혁신학 전통을 바로 인식하고 계속 개혁하는 산 교회와 신학활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급적 학생의 수를 줄여서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문제되는 것은 경영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라면 학생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방식을 지양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살리는 목적을 담아야 한다고 본다.

즉 신학교 교직원의 생계에 목적을 두지 말고, 교회를 살리려는 생각을 먼저 하자는 것이다.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신학이 살고, 신앙이 살아야 한다. 그것은 신학교가 많아야 한다든가 신학생이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신학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 신학자들을 살려야 한다. 어떻게 할까? 우리 교단 산하에 신학교 교수들을 다 신학 연구 요원으로 치고, 다 합해서 약 2백 명이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교회들이 생활비를 주어 생활보장을 해주자는 것이다. 우리 교단이 선교사로 내보낸 사람이 1천 명을 육박하는데,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과 신학자를 후원하는 일을 비교하면 어느 편이 더 비중이 크겠는가.

이미 석좌제를 통해 신학교수를 지원하는 교회들이 많은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교회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도 이런 석좌제도가 확대되면 좋겠다. 신학자들은 생활보장을 받았으니 열심히 연구하여, 교회에 공급해 주어야 할 것이다. 저술과 강연, 세미나 인도 등 할 일이 많다. 그리고 신학교는, 과잉 공급된 목사들이 임지를 얻기까지, 신학생을 입학을 제한하여 균형을 이루게 되면, 수급계획을 정립해 꼭 필요한 수의 신학생을 전액 장학금을 주어 교육시킴으로써,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영성교육을 위해 무엇보다도 신학교 교수들의 각오가 투철해야 한다. 교수 하나 하나가 예수를 닮아야 하고, 또 다른 예수 닮은 제자를 양육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교육에 임해야 할 것이다. 서두에 말한 대로 후회되고 부끄러운 것은 나 자신이 바른 신학교육을 하지 못하였고, 나 스스로가 얼마나 제자들에게 예수의 참된 증인의 역할을 했는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신학교육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도 그것을 바르게 하여 하나님의 양들을 바르게 기를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신학교 교수들이기에 그 짐을 바로 지려고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능력이 있다. 하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과 재원을 가지고 있다.

신학교육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교회는 점점 쇠퇴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고  부끄럽고  아니  벌을  받아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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