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레의 트럼펫나무

할레의 트럼펫나무

[ 음악에세이 ] 유혜자 음악에세이(136)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7년 11월 22일(목) 00:00

   
 
그 림 장 주 봉
 
헨델의 생가에는 친필 악보와 사용하던 악기, 생애와 작품에 대한 사진과 기록이 체계 있게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품은 대충 둘러보고 마당 가운데 서 있는 트럼펫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단풍이 들어 누런 동그란 이파리들 아래로 국수가닥처럼 가는 줄기가 수없이 늘어져 있는 굵은 둥치의 거목으로 트럼펫나무라는 작은 명패만 붙어 있고 안내인과 직원에게 물어도 유래나 수령도 알 수 없어 아쉬웠다. 국수가닥 같은 가는 줄기는 꽃이 지고 나서 생긴 것 같았다. 언젠가 사진에서 트럼펫을 거꾸로 매단 듯한 앤젤스 트럼펫(angels trumpet)꽃을 본 일이 있는데 아마도 그런 꽃이 피었을 것 같았다.

마당 한 쪽에서 들고 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잎을 흔들고 있는 트럼펫나무. 그 나무는 자신의 존재를 무시한 채 지나치는 사람들 때문에 울적한 마음을 지녔을까. 나무는 꽃이 피었을 때나 저버린 때도 트럼펫의 화려하고 힘찬 소리를 내고 있지만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눈부신 빛살너머로 음표의 파편들을 쏟아내고 있을 것 같았다.

헨델(Handel, George Friedrich 1685-1759)의 음악에는 화려하고 힘 있는 금관악기 트럼펫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헨델이 살았을 때나 사후에 누가 심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헨델은 독일의 할레에서 태어났지만 25세부터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다. 그런데도 할레는 헨델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크게 자랑하고 있다. 구 시가지 광장에는 그의 늠름한 동상이 서 있고 시가지에도 헨델의 생가를 알리는 안내판을 곳곳에 세워 놓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게 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 영국에 머물면서 영국이 자랑하는 국민 작곡가로, 오페라 극장을 경영하는 등 성공과 실패로 부침을 거듭했다. 52세(1737)때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작곡자 겸 경영자의 종지부를 찍었는데 다행이 51살 때부터 왕성한 창작력으로 오라토리오 작곡을 시작하여 오늘날에도 사랑 받는 '메시아'의 성공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56세 때 오라토리오 '입다'의 작곡 중 시력을 잃었다. 의지가 강한 그는 좌절하지 않고 실명 후에도 오라토리오 상연의 지휘를 맡아 하고 옛날 작품들을 고쳐 쓰는데 힘썼다. 74세로 세상을 떠나자 영국인의 최고 영예인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 묻힌 헨델. 

나는 꽃이 지고 난 트럼펫나무를 올려다보며 야외음악 사상 최고 걸작으로 평가 받는 '왕궁의 불꽃놀이'를 생각해 보았다. 을씨년스러운 가을바람에  화려한 불꽃놀이 음악이 위로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64세때인 1749년, 영국은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영국 황제 조지 2세는 8년이나 계속된 긴 전쟁에서 해방된 기쁨을 축하하는 대규모 불꽃놀이를 계획하고 헨델에게 그 행사를 위한 식전음악 작곡을 의뢰했다. 헨델은 군용악기를 쓰라는 영국 황제의 요구에 따라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대합주 편성의 음악을 작곡했다. 트럼펫, 호른만도 9대씩, 오보에는 무려 24대나 되고 그 밖의 다른 관악기도 많은 숫자로 57인의 대합주 편성이었다. 특히 불꽃놀이가 있었던 런던 그린파크의 초연에는 그보다도 관악기를 늘려 1백 개 이상이나 사용했다고 한다.

'왕궁의 불꽃놀이'는 1곡 서곡과 2, 3, 4, 5곡으로 된 모음곡인데 자이로이트의 편곡엔 2곡 '평화'가 한 곡 더 들어가 6곡으로 되어있다. 특히 5, 6곡은 트럼펫이 주류를 이루는 행진곡풍으로 '환희'란 표제가 붙어 있다. '왕궁의 불꽃놀이' 중 가장 밝고 인상적이어서 현재도 이 부분이 자주 연주된다.

이 음악을 들으며, 하늘로 솟아오를 수 없는 괴롬과 절망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바라보고 희망을 얻으려 노력한 일도 있다.

트럼펫나무는 눈여겨 봐주는 이 없어 초라하게 호젓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일, 다음 계절엔 내 안의 불꽃을 피워보라고 다독여 줄 것 같았다. 자신도 단풍들고 쇠잔해가면서 뜨거운 열망과 그리움을 지니고 있다고.

발걸음을 돌려 떠나려는 내게 트럼펫 나무는 시든 잎 하나를 떨어뜨려 이별의 표적을 보여 주었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