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세이] 바람과 자유

[음악에세이] 바람과 자유

[ 음악에세이 ] 유혜자음악에세이(134)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7년 10월 24일(수) 00:00
   
 
 
하늘빛이 청명해지면서 나무이파리를 흔드는 바람이 보일 듯하다. 바람은 어떤 구속이나 속박 없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서 좋다. 바람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향해가며 사람들을 부추긴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시공을 초월하여 사랑 받을 것을 열망하기도 하지만 어떤 장벽이나 소속과 무관한 자유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어주는 대로 자신을 의탁하고 싶어 하다가도 시대적인 거센 바람이 불 때 그들은 어떻게 맞서서 위기를 넘겼을까.

알레그로의 템포로 잔바람을 일으키며 오는듯한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Prokofiev, Sergei 1891-1953)의 교향곡 1번 (D장조)을 듣는다. 부제를 '고전교향곡'이라 붙인 이 음악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화음, 그리고 기동성 있는 리듬 등 피아노를 뺀 윤곽이 뚜렷한 '고전파 형식을 현대적으로 쓴 것'으로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작고 길이도 15분밖에 안 된다. 브루크너와 말러가 60분이 넘는 길이에 악기 편성도 방대해진 것에 회의를 갖고 단순한 교향곡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재학 중 하이든을 연구했던 그는 "하이든의 교향곡을 배우면서 흥미를 느끼고 그가 현대에 생존했다면 썼을 법한 곡을 쓰려 했다"고 했다. 고전시대 작품처럼 4개 악장인데 고전시대에 썼던 3박자의 미뉴에트 대신에 2박자의 가보트를 3악장에 넣었다. 5세 때 피아노곡을, 열 살에는 오페라를 작곡할 만큼 천재였던 그는 스트라빈스키 같은 파격적인 변화에는 비판적이면서도 당시 연극, 회화의 변화를 접하고 음악에도 새로운 작풍을 시도했다. 고전적인 작법이지만 단순한 모방이나 습작, 패러디가 아니라 화성법이나 갑작스러운 조바꿈에서 프로코피예프다운 생기가 있고, 서정적이고 무용음악적인 재능이 잘 드러나 있다.

러시아에서 2월과 10월, 두 차례나 혁명이 발발했던 1917년에 그는 '고전교향곡'을 비롯해 소나타 두곡과 바이올린협주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할 정도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러나 시대적인 거센 바람을 비켜 갈 수는 없었다. 2월 혁명 후 좌파 예술 활동을 이끌었던 예술가 동맹에 가입했지만 내전으로 투옥되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음악이 설 장소가 없게 되자 해외 연주를 떠났다가 돌아가지 않았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어서 미국으로 갔다가 서 유럽 파리에서 생활하던 그는 고국이 그리워졌다. "러시아 인은 외국의 다른 공기, 다른 환경에서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서 러시아 말의 노래가 울리는 것을 듣고 싶던 차에 고국에서 돌아오라는 요청에 18년 만에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그리던 러시아 공기, 바람은 냉혹했다. 당시 동료 작곡가들은 스탈린의 압박 아래 창작의욕을 잃고 혁명적인 음악을 쓰는 형편이었다.

교향곡, 피아노곡 등 실내악, 오페라, 어린이 음악을 쓰고 싶은 대로 작곡할 능력이있던 프로코피예프는 동료 작곡가들이 시대적인 압박으로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누구보다 건강한 창작활동을 했다. 어린이를 좋아하여 '피터와 늑대' '미운오리새끼'와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영화음악 등 혁명사상을 반영하지 않아도 될 음악을 즐겨 썼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음악양식이나 형식문제에 깊이파고 들지 않은 특성으로 인해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나하는 시각도 있지만, 거센 바람에 힘줘서 맞서지 않고, 조금씩 흔들리면서 큰바람은 피해 늦게까지 푸른 잎새를 지니고 있는 버드나무가 생각난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압박을 가했던 스탈린이 실각하면 숨통이 틜까 하고 바라지 않았을까. 그중의 한사람이었을 프로코피예프는 묘하게도 62세에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위인 스탈린과 같은 날 숨을 거두었다. 거센 바람에 힘줘서 맞서지 않아, 커다란 탄압을 피해서 나름대로 자유롭게 작곡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스탈린보다 몇 년이라도 더 살았더라면 현대음악의 판도를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으로 일찍이 끝나버린 '고전교향곡'을 다시 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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