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간

행복한 시간

[ 음악에세이 ] 유혜자 음악에세이(131)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7년 08월 14일(화) 00:00
슈베르트가 말년에 쓴 피아노 소나타 제21번(B플랫장조 작품960)을 듣노라면 그의 시(詩) '시간'의 구절이 생각난다. "끊임없이 시간은 흐른다 / 사랑하는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인생 여정의 동반자 / 세월은 우리와 함께 무덤에 내려앉는다 / 단지 숨결...그것은 세월/...단지 울림... 그것은 세월...”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났던 슈베르트(Schubert Franz 1797-1828)는 이미 16세에 세월의 허무를 노래했다. 1악장에서 어두운 서정으로 시작된 멜로디가 다시 격렬하게 치달을 때는 짧았던 그의 생애 속에서 그를 스쳐간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이별과 고독의 그림자가 배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쓸쓸함 속에도 따뜻한 정이 담겨 있어서 더욱 소중하다. 그를 아껴주던 친구들의 우정이다.

슈베르트는 일정한 수입이 없어 친구의 집에 기거하는 등 친구들의 도움으로 지냈다. 친구들이 음악을 좋아하면서 창작에 도움을 주었기에 경제적으로는 궁핍해도 마음만은 여유로웠다. 그는 샘솟는 영감과 창작열로,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밤중이나 길을 가다가, 혹은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도 영감이 떠오르면 오선지에 옮기기가 일쑤였다. 오전에는 규칙적으로 창작에 몰두하려 했고 오후에는 친구들과 산책을 하고, 밤에는 역시 친구들과 어울려서 대화를 즐기고 술을 마시며 창작으로 지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가 죽음을 앞둔 몇 달 전 이 음악을 작곡할 때는, 헐벗은 나목처럼 외로울 때 초록 이파리처럼 감싸주던 친구들도 모두 자신의 일을 찾거나 외지로 떠났기에 편지로나 연락을 하던 처지였다. 그래서 떠나버린 친구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소나타 제21번(작품 960)을 포함, 소나타 작품 958, 959 등 '슈베르트 최후의 작품 3개의 소나타'를 쓸 때 35세이던 슈베르트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27세 때 그는 장티푸스에도 걸리고 그후 두통 증세와 매독 증세로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걸작들을 작곡하였다. 그 결과 숨지던 해 봄에는 '슈베르트 연주회'가 공식 행사로 확정되는 성공을 거뒀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져서 빚도 갚고 바라던 피아노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치료되지 않는 병중이었으니 이 음악을 작곡하면서 통증이 올 때는 '사랑하는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라든가 '인생 여정의 동반자 / 세월은 우리와 함께 무덤에 내려앉는다'란 자신의 시구(詩句)를 떠올리고 힘이 되어주었던 친구들을 그리며 "이 음악이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을 했을는지 모른다.

극한의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탄생된 그의 소나타들이 가장 심오한 걸작이어서 말년을 장식한 의미 깊은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그의 사후에라도 친구들 또한 감명 받았을 것이다. 특히 제21번은 전 소나타 중 단연 걸작으로 게오르기(Walter Georgie)는 "슈베르트 피아노 작품의 최고봉이며 베토벤 이후 작곡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흠모하고 그의 작품을 닮고 싶어 했던 것은 알려진 사실. 베토벤보다 27년 늦게 태어난 슈베르트는 친구 시인들의 가사와 자신의 뛰어난 창조성과 영감으로 '가곡의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기악 부분에서는 그를 따를 수가 없어 노력을 많이 했다. 슈베르트가 조금 더 살았더라면 베토벤 류가 아닌 자신의 형식을 완성하고 소나타 창작의 종지부를 찍은 소나타 제21번보다 더 좋은 곡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소나타 제21번의 2악장 안단테에서는 그 자신도 요절을 예감한 듯 아련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슈베르트가 좋아한 시인 F.실러(1759-1805)는 "시간의 걸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짧은 생애에서 시간의 어떤 걸음에 동의하며 행복한 시간을 추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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