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재생

영웅의 재생

[ 음악에세이 ] 유혜자 음악에세이(129)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7년 07월 03일(화) 00:00
어렸을 때 좋아한 역사적인 영웅이야기는 성장하면 우리 생활의 외곽으로 밀려나서 잊혀지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인물은 일찍 입력되어서인지 아주 사라지지는 않고 기억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가 이따금 재생되곤 한다. 예술가들은 감명 받은 역사적인 인물이나 전설 속의 영웅들을 자유로운 정신과 상상을 통해 작품 속에 재생시킨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고야의 '성 베드로', 샤갈의 '다비드 왕' 등이 시각적으로 재생된 미술품이라면, '돈 키호테'의 세르반테스, '빌헬름 텔'의 실러, '차라투슈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니체, '칼의 노래'의 김훈 등 소설가, 철학자들은 사상, 성격묘사와 행동, 대화로 재생시켜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 작가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으면 동질적인 의미에서 친근감으로 다루고 자신을 투사하여 자기에게 없는 것을 보완하여 완벽한 인물로 가동하게 만든다.

베토벤(Beethoven, Ludwig van 1770-1827)은 음악으로 영웅을 재현했다. 로마의 장군인 용맹한 코리올라누스(BC 6세기말-BC 5세기 초)와, 압제자들에게서 자유를 쟁취하게 한 에그몬드의 백작(라모랄 1522-1568)을 좋아해서 두 인물에 대한 서곡을 작곡했다. 그 중 먼저 1807년에 작곡한 것이 '코리올란' 서곡이다. 베토벤은 친교를 나눈 시인 하인리히 요제프 폰 콜린이 쓴 희곡 '코리올란'을 보고 정열적이고 용감한 장군에 매료되었던지 그 비극적인 주인공의 이름으로 오페라의 서곡이 아닌 연주회용 서곡을 작곡했다.

베토벤은 어떤 면으로 보면 코리올란의 불굴의 자신감과 열정이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명이 케이아스 마샤스인 코리올란 장군은 단신으로 코리올라이 성을 공략, 성공하여 코리올라누스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흔히 독일어 발음으로 코리올란이라 부른다. 코리올란은 성의 함락 뿐 아니라 계속 무훈을 세워 정치적으로 기반을 쌓았으나, 로마가 공화체제로 바뀌면서 정쟁에서 패하여 추방되자 적대국가인 보르시아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공을 세웠다. 불과 2년 만에 보르시아 장군이 되어 대군을 이끌고 로마를 공략한다. 이들이 로마 성문까지 들어왔으나 로마군 쪽에서는 그의 어머니와 아내를 앞세워 그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한다. 그는 어머니와 아내의 설득에 보르시아 군에 반기를 들지만 끝내 자결하는 스토리로, 8분짜리 서곡 속에 이 극적인 스토리를 담았다.

이 관현악은 정열적인 코리올란을 상징하는 화려한 화음의 극적인 제1주제로 힘차게 시작되는데 이어서 불안하며 격렬한 마음이 표현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제2주제가 어머니와 아내의 애원하는 듯한 간절한 마음이 담긴듯하다가 뜨겁게 전개부를 발전시키고, 이어서 재현부, 크고 감동적인 클라이막스 등 실로 극적인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자신만만하고 정열적인 주인공의 불굴의 의지, 슬픈 운명에 대한 분노가 분출하는 듯하다가 점차 약해지면서 끝나버려서 주인공의 소용돌이 인생의 임종을 보는 듯 허무하다.

1802년 베토벤이 치명적인 귓병으로 자살을 염두에 두고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했다가, 줄기찬 창작 의욕으로 재기한 이후의 작품이라 '코리올란'에는 일종의 비장미가 있다. 어쩌면 말로는 다 나타낼 수 없는 베토벤의 깊은 속마음이 작품 속에 정직하게 드러난 것이 아닐까. 슬픔을 감추며 의연하게 산 것 같아 연민 비슷한 감동이 일곤 한다.

바그너는 "베토벤의 위대한 힘은 불굴의 자신감과 열광하는 반항심, 분노, 증오, 복수, 파괴적 정신 속에서 영웅의 모습을 재현했다"고 했다. 베토벤 자신도 이 희곡의 주인공 속에서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면을 찾아내어, 음악 속에서 자기의 표현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예술가들은 제각기 보이지 않는 마음 한가운데에 고독을 키우며 산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에 좋아하는 인물을 재생시켜서 그들과 교감을 나누며 살아간다.

어쩌면 남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기보다는 자신의 밑바닥에 있는 본연의 자신을 만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