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일기] 노라 돌아오던 날

[산방일기] 노라 돌아오던 날

[ 산방일기 ] 장돈식 산방일기(125)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7년 06월 27일(수) 00:00
'노라'가 돌아왔다. '노라'는 우리 집 암탉 중 한 마리의 이름이다. 내가 기르는 토종닭들은 보통 저녁 7시면 다 계사에 들어와 홰에 올라 잔다. 아침에 닭 집의 문을 열어주면 내려와서 모이를 먹고 물을 마시고 무리지어 집 주변, 드넓은 풀밭을 온종일 헤집고 다닌다.

   
집에서 기르는 닭을 외모로는 닭마다의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더 자세히 관찰하노라면 겉으로의 생김새로는 구별이 잘 안되는 개체들 마다 개성의 차이는 많이 본다. 드물기는해도 이 '노라'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려는 녀석을 발견할 때도 있다. 이 방그러니계곡도 산골이라 닭을 해코지하는 오소리, 삵, 산고양이 등이 있는데 '노라'는 밤에는 무리에 섞이지 않고 혼자 다니며 위험에 노출되기를 자주한다. 그러면서도 어디서 자고나와 아침이면 무리에 합류하는 지, 밤의 종적은 모른다.

5월 초순에 '노라'는 또 집을 나갔다. 낮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가출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근처 숲속, 바위틈을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허탕이었다. 밤에 어디서 혼자 자다가 어느 포식자에게 먹혔을 것으로 짐작되기는 한다. 그렇다면 깃 터럭이라도 흘린 흔적은 있어야 한다. "불쌍한 것" 하고는 가족들은 '노라' 찾기를 단념하기로 했다.

그런데 실종된지 한 달이 가까운 지난 5월 하순에 녀석이 나타났다. 내가 집의 닭들을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도 고집스럽게 울타리로 가두지 않고 넓은 초원에 철저히 놓아기르기를 고집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지난 6월 첫 수요일 어느 TV에서 인간들이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동물을 학대하는 국내외 현장을 취재해서 고발했다. 우리나라 어느 양돈장에서 암퇘지가 자기가 낳은 새끼를 보듬어주고 몸에 묻은 점액을 핥아주고 싶으나 돌아설 공간이 없어 안절부절 했다. 양계장을 비췄다. 30cm 6면체의 공간에 산란계(産卵鷄) 3마리를 넣어 기르는 케이지 양계장이었다. 너무 좁아 뒤로 돌아설 수도 없다.

그 가두리 앞에는 학자들에 의해 영양분이 합리적으로 조제된 먹이가 24시간 공급된다. 업계에서는 부단급이(不斷給餌)라고 한다. 신선한 채소나 풀을 먹을 수 없다. 따라서 기본영양소 외에 무기염류, 각종 비타민과 갇혀 있는 스트레스로 병약해지는 닭들의 건강을 촉진하려는 항생제가 들어있다. 배가 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신다. 섭취한 영양분은 생리작용에 의해 계란이 되고 시간이 되면 진통 끝에 마침내 산란을 한다. 닭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낳은 알을 품어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양계장주인은 철사바닥을 경사(傾斜)지게 해 놓았다.

낳으면 둥근 알은 굴러 내려간다. 필사적으로 끓어 올려 품을 수 있을만하면 다시 굴러 내려간다. 시간이 되면 회전 컴베어가 작동, 알들은 저란고(貯卵庫)로 직행, 어미닭과는 다시 만날 수 없다. 닭은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모성애가 있다. 그러나 그따위 감정은 철저히 무시되고 오직 인간이 얻고자하는 고기와 알만을 생각한다. 그 방송 프로그램을 보다가 채널을 돌렸다. 다음 날, 동물애호가들의 모임에서 돼지고기와 양계생산물 불매운동을 한다는 신문의 기사도 외면했다. 내가 저 동물들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는 자책감이었을 것이다.

나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시골 농업학교에서 가르치며 한국의 낙후된 농업을 선진화하려는 농촌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골에의 그 교육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학교를 그만두고 농장 운영을 시작한 것이 1960년 초였다. 먼저 양계를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양계는 평면사육(平面飼育)밖에는 없었다.

닭을 땅바닥에서 기르면 평당 15 마리가 한계다. 닭을 케이지에다 수용하면 평당 45~60 마리를 기를 수 있다. 내가 우리나라 최초로 케이지사육법을 도입했다. 처음에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양계가 들은 나의 놀라운 높은 생산성과 관리의 편리함과 경영규모를 쉽게 확대할 수 있음에 놀랐다. 연일 전국의 양계가 들의 우리 양계장 견학(見學) 행렬이 줄을 이었다. 강연 초청도 많아 자리 더울 날이 드물었다. 그 후로는 '경제양계'하면 케이지사육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나이 들면서 사업을 접고 산방(山房)에 집거하며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요즈음, 마음이 편치 못하다. 사람들은 우리 이웃인 동식물들의 지배자가 아님을 알고 이들과 이웃으로 친해져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산방생활을 시작한지 10년 언저리였다고 생각한다. 요즈음에는 현대 경제양계와 정 반대인 토종닭 기르기에 푹 빠져 지낸다. 집 나갔던 '노라'를 대하노라면 가출했던 딸을 대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럴까,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의 심정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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