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데스크 칼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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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7년 06월 26일(화) 00:00
6월은 참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달입니다. 나라와 민족,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믿음의 선진들과 6ㆍ25 한국전쟁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산화(散花)한 수많은 젊은이 등… 호국보훈을 넘어 경천 애국 애인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이제 중년의 나이로 접어든 7080학번 세대들은 6ㆍ10 민주화 항쟁으로 시작해 6ㆍ29 선언으로 이어지는 그 한 달여의 시간들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 사망 사건에 이어 6월 9일 4ㆍ13 호헌조치에 대한 시위 도중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머리에 최류탄 파편을 맞고 사경을 헤매는 사태가 발생하자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명동성당 농성투쟁, 18일 최루탄 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 쟁취 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일간 전국에서 연인원 5백만 명이 참여하여 민주화 촉구를 위한 거리집회와 시위가 계속됐습니다.

마침내 역사의 그날인 29일, 민정당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 대표위원이 이른바 '6ㆍ29선언'이라는 직선제개헌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발표합니다. 87년 6월 이후 세대도 올해 대통령 선거권을 갖게된 요즈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올해 투표권을 갖게된 아들녀석이 문득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란 시를 아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너는 그 시를 어찌 아느냐?"고 제가 되묻자 내용은 모르고 요즘 '복고'열풍인데 여자친구에게 편지쓸 때 한 줄 인용할까 해서 제게 묻는다는 것입니다. 시의 제목은 낭만적이지만 그 시가 담고 있는 순수함과 열정과 회한을 모를 아들에게 그 시를 어찌 설명할까 잠시 망설였습니다.

"4ㆍ19가 나던 해 세밑, 차가운 방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던 우리는 정치와는 무관한 일을 위해 살리라 다짐했다. 모임을 끝낸 밤 우리는 혜화동에서 사랑과 아르바이트, 군대 등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그로부터 18년 만에 우리는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처자식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음식을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몇은 포우커 게임을, 몇몇은 춤을 추러 갔고 몇몇은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그들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서 가로수 잎이 그들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을 귓전으로 흘리며 그들은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의 개략입니다.

18년 전에 화자는 차가운 방에서도 민주화를 위해 열띤 토론을 벌였던 젊은이였는데 중년이 된 그는 젊은 시절의 그 순수함과 열정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며 소시민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화자 만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현실이라고 시는 말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세속화되고, 순수함과 열정을 잃어버린 모습을 부끄러워 하면서도 다시 현실의 늪으로 발을 옮기는 화자의 모습이 쓸쓸합니다. 마감날 오후, 저도 6월을 보내며 혜화동이 보이는 사무실 창가에 서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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