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뭇한 협력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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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에세이 ] 유혜자 음악 에세이(126)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7년 05월 16일(수) 00:00
웅대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3분이나 흘렀을까. 3중 협주곡의 세 악기 중 첼로가 먼저 화려한 독주를 선보이고, 다음엔 바이올린이 전력을 다해 미려한 소리를 뽑아낸다. 그리고 이어서 생동감이 넘치는 피아노 독주가 계속된다.

피아노 거장들의 연주를 볼 때마다 감탄한다. 우리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건반들이 손가락에게 신호를 보내면 손가락이 재빨리 터치해서 작렬하는 것처럼 신묘하게 느껴진다. 지금 보고 있는 DVD속의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의 경우도 그렇다. 1941년 아르헨티나 외교관의 딸로 태어난 아르헤리치는 16세에 부조니 국제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 연거푸 우승했고, 25세에는 쇼팽 콩쿠르에 우승하면서 불꽃처럼 뜨겁고 충동적이며 기백이 넘치는 '피아노의 여제'로 인정받아 왔다. 그리고 남다른 정열로 연주하는 도중 어느 순간엔 '한 차례의 전율'을 몰고 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연주자의 나이에 대해 초연할 수가 없다. 젊은 날부터 고수해 온 검은 드레스 차림이지만, 풍성하게 길던 검은 머리가 많이 성글어진 60대 중반의 아르헤리치가 등장할 때 '불꽃같이 뜨거운 정열과 예민한 감성' '폭풍'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연주를 해낼까 걱정을 했었다. 더욱이 오늘 협연자들은 최근에 각광 받는 아들 또래의 형제로 바이올린의 르노 카푸숑(Lenaud Capuson), 첼로의 고티에르 카푸숑(Gauthier Capuson)이다. 2005년 라 로크 당테롱 피아노 페스티벌에서 알렉산더 바라코프스키 지휘로 플란더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베토벤의 3중 협주곡 C장조이다.

이 음악은 베토벤이 창작 의욕에 불타고 있던 때 그의 스폰서이며 피아노 제자였던 루돌프 공에게서 작곡 의뢰를 받았다. 개인 오케스트라를 갖고 있던 피아니스트 루돌프 공이 어렵지 않게 연주할 수 있게 베토벤은 의도적으로 3중 협주곡에서 피아노의 비중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헤리치의 '한 차례의 전율'을 느낄만한 곳이 없을 런지 모르겠다. 작곡할 당시 루돌프 공과 함께 연주할 바이올리니스트인 자이텔은 대 연주가였고, 첼리스트 크라프는 하이든 생존 시에 궁정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로 하이든이 첼로 협주곡 D장조를 써주었을 만큼 거장이었다.

'강력한 폭발력과 큰 스케일'의 평판을 받아온 아르헤리치에게는 이 음악이 다소 불만스러웠을지 모른다. 사실 협주곡을 연주할 때보다 독주곡에서 자신의 장단점을 드러내는데, 휘몰아치는 정열이 매력인 하르헤리치는 리듬이나 템포가 균형감을 잃을 때도 있다고 한다. 그는
한동안 독주보다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플루티스트 제임스 골웨이 등과 공동 작업을 해왔다.

3중 협주곡이 첼로, 바이올린, 피아노 등 3개의 독주 악기를 대등하게 활약시킨다는 문제 때문에, 세 사람 명수의 솜씨 겨루기가 목적이 아닌 이상 오늘날엔 별로 연주되지 않는다. 그런데 거장 아르헤리치는 신예들과 협연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가능성 있는 후배 피아니스트를 적극적으로 이끌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 임동혁 군도 그중 하나이다.

그런 생각으로 화면을 보니 대선배인 아르헤리치는 말 대신 여유로운 연주로 후배인 첼리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듯하다. 1악장이 17분 이상 계속되었으나 피아노가 돋보이는 부분이 없이 지나가고 2악장이 시작되었다. 베토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라르고' 악장이다. 가슴에 스며드 서정적인 선율로 피아노는 유연한 현의 선율을 돋보이게 양보하는 듯하다. 원래 실내악에서 각 악기들은 서로 경쟁하기보다 대화를 나누면서 조화를 이뤄가는 것이 아니던가.

3악장은 밝고 경쾌하다. 발랄하며 생명감에 넘치는 부분에서 이르헤리치는 다소 긴 머리를 뒤로 젖히며 빛나는 연주를 계속한다. 그의 별명 '여제'처럼 군림하지 않고 지휘자와 협연자, 그리고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공유의 감동을 전달하려는 모습이 강렬하면서도 인상적이서 오래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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