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와 느낌의 미학

배려와 느낌의 미학

[ 음악에세이 ] 유혜자 음악에세이(125)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7년 05월 02일(수) 00:00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들은 <음악>이라고 하는 것을 몽땅 어깨에 짊어지고 끊임없이 산 위를 올라가야만 하는 시지푸스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명대사를 비롯, 주목받지 못하는 예술가의 고뇌를 그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는 얇은 책인데도 그 감명은 묵직하게 남아 있다.

나는 그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이 슈베르트(Schubert,Franz 1797-1828)의 피아노 5중주곡 A장조<송어>를 소개하고 그 음반을 플레이어에 걸어놓고 나서 퇴장하는 것이 기억나서 그 음악을 자주 듣는다. 아름다운 선율의 4악장을 들으면서 <콘트라베이스>에서 그 음악을 틀어놓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미처 못 느꼈던 콘트라베이스 소리가 전 악장을 통하여 낮은 음역에서 받쳐주고 있는데, 특히 4악장에서는 가곡 '송어'의 선율을 먼저 바이올린이 연주하고 비올라, 첼로 그리고 이어서 콘트라베이스가 주제를 실은 변주를 당당하게 펼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슈베르트는 22세에 친구인 바리톤 가수 포글의 고향인 슈타이어로 피서를 가서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상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 지방의 음악 애호가인 파움가르트너를 만났는데 슈베르트가 2년 전에 작곡한 가곡 '송어'를 주제로 하여 동료 5인이 연주할 수 있는 실내악을 작곡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슈타이어에서의 생활이 즐거웠던 만큼 싱그럽고 생기발랄한 시정의 스케치를 그곳에서 만든 후 완성은 빈에 돌아와서 할 수 있었다. 이 음악이 피아노 5중주인데 대개의 피아노 5중주는 제1, 2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에 피아노가 곁들여진다. 그런데 이 음악은 제2바이올린 대신에 콘트라베이스가 편성되어 있다. 파움가르트너의 동료 중에 베이스 주자가 있었지 않았나 짐작해보며, 전체의 상쾌한 분위기 속에서 묵직하게 받쳐줘서 음악을 돋보이게 한다고 느낀다.

남자 배우가,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가 오케스트라에서 중요한 존재이면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절망하고, 소프라노 여인을 짝사랑하면서 이뤄지는 어려움에 안타까워하는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를 읽기 전에는 콘트라베이스는 다른 악기의 밑에서 깔아주는 미미한 존재로만 알아왔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서 비로소 콘트라베이스가 음악을 돋보이게 하고 무게를 실어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년에 세계적인 슈테르거콩쿨에서 우승한 성민재(종합예술학교 2학년)군의 아버지 성영석씨도 인터뷰에서 콘트라베이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정정하게 해주었다. 역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성 씨는 "힘이 많이 들어가고 어려운 악기이면서 대중들이 별로 인정해주지 않지만 아들을 훌륭한 연주자로 만들려고 어려서부터 하루 6시간씩 연습을 시켜왔다"고 하면서, 인성이 음악에 반영되는 만큼 인성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줄리어드 음악학교의 입학허가서도 받았지만 부모 밑에서 공부하게 한다고 했다. 또 아들 민재 군도 '콘트라베이스를 깔아주는 악기로만 아는데 폭넓은 음역을 가진 인간적인 악기'라고 하며 <모세 환타지>를 멋지게 연주해 주었다.

"…그냥 듣기에는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나 트럼펫이 더 큰 소리를 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저음의 진동력이 있어서 소리가 퍼지는 범위가 넓고 무게가 있다는 것을 들으면서 점점 느낄 수 있게 된다"는 모노드라마 주인공의 대사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그 존재의 중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의 통념이란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 일차적으로 눈에 띄고 귀에 들려오는 것으로 나머지의 감각은 막아버리는 것 같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마음의 눈과 귀를 열고 자신을 만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작은 존재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편견으로 인해 소외시켰던 것들에 대한 따뜻한 느낌, 배려와 느낌의 미학이 강조되어야 할 세태이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은 어차피 '짐을 무겁게 어깨에 짊어지고 끊임없이 산 위를 올라가야만 하는 시지푸스'가 아닌가.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