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돈식의 산방일기](121) 산방의 철새들(1)

[장돈식의 산방일기](121) 산방의 철새들(1)

[ 산방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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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4월 25일(수) 00:00
20년쯤 전이다. 내가 아직 이 방그러니의 신참시절을 생각한다. 집 둘레는 무성한 숲인지라, 봄철 이맘 때, 3~4월경이면 많은 새들이 모여 들었다. 겨울을 이 지경에서 지낸 겨울 철새들은 여름이 덥지 않은 저들의 고향, 서늘한 북녘으로 간다. 가기 전, 여름 철새들과 교차(交叉)하는 모임을 우리 숲에서 가졌다.

더운 지방에서 겨울을 난 여름 철새들도 멀고 먼 하늘을 날아와서 나래를 쉬며 저네들이 여름을 지낼 곳으로 흩어지기 전 모임을 우리 숲에서 가지는 것 같았다. 나는 저들의 모임에서 나누는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니 그저 소음일 뿐이다.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 어둑한 새벽부터 수 십, 수 백 마리가 목청 끝 떠들어대면 귀는 멍해지고 잠은 멀리 달아난다. 읽을거리에 눈을 줄 수도, 아참 명상을 할 수도 없다.

   
고민을 했다. 숲의 나무들을 잘라내야 하나, 이사를 가야 하나, 지금 생각하면 사치스러운 갈등이었다. 지금 숲은 그대로이건만 날아드는 새의 수효는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어 이제는 아침이 너무 조용해져서 적막감마저 든다. 최근 어느 미래학자는 2080년대가 되면 이 지구상에는 인간과 사람이 사육하는 가축이라는 동물만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가을이면 오고, 봄이면 떠나는 겨울 철새, 봄이면 오고 가을이면 가는 여름 철새, 해마다 그 수효와 종류가 줄어들어 지난 날의 그 소란스럽던 새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나의 어릴 적 고향은 황해도다. 집 앞에 우리가 경작하는 5천 평 넓이의 밭이 있었다. 서북지방의 농사가 그렇듯이 가을에는 밀과 보리를 씨 뿌렸다. 겨울이 되기 전에 밀과 보리밭은 파랗게 새싹으로 덮여 겨울에 바라보는 초록은 신선했다. 10월부터 이듬해 봄에서 여름까지 푸른 밭이어야 하는 데 때로 아침에 바라보는 밭은 회색이었다. 눈을 부비고 다시 보면 수 천 마리의 쇠기러기가 온 밭에 내려 앉아 밀의 푸른 새싹을 뜯어 먹고 있다. 그게 우리 밭만의 현상이 아니고 지방 전체의 재앙인 것이다. 겨울에 싹이 뜯기기를 거듭한 밭은 그 해에 제대로 된 낟알의 수확을 바랄 수 없었다. 그런 철새 기러기로 인한 수난을 견딜 수 없어 겨울 철새의 피해를 받지 않는 과수원으로 식종(植種)을 바꾸어야 했다. 그 시절 그 많던 기러기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

항공기들이 나는 하늘에도 길은 있다고 한다. 비행기의 길이 있듯이 철을 따라 이동하는 새들이 하늘을 날아 오가는 길을 나는 안다. 1천2백 여 m 높이의 형님격인 치악산과 1천1백 여 m의 아우격인 백운산, 두 산 사이의 좀 낮은 곳에 나의 산방은 있다. 우리나라 남녘에서 겨울을 지낸 기러기 떼가 북으로 날아예는 하늘 길은 정상을 피해서 기러기들의 고향인 시베리아의 툰드라지역으로 가는 하늘길이다. 나의 산방을 지은 초기의 3~4월에는 하늘 길에 많은 기러기들이 오갔었는데 지금은 어쩌다 한 무리의 기러기가 지날 뿐이다.

어제는 남쪽하늘에서 기러기의 한 떼가 八자 행렬을 이루어 산방 위를 높이 날아 북녘 하늘로 날아갔다. 그 행렬이 검은 점으로 사라지기까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검은 실타래가 풀리듯 산을 넘어 왔다. 북녘 만 리 하늘아래 자기들을 낳아 길러준 땅, 시베리아의 광활한 습지가 목표일 것이다.

목을 길게 뽑아 똑 바로 앞만 보고, 두 다리를 꽁지께로 바짝 붙인 자세였다. 3kg이나 나가는 체중에 비해 좀 작은 날개로 정말 열심히 날개 짓을 했다. 비교적 장수하는 이들은 내왕 경험이 많은 선배기러기가 앞장을 섰을 것이다. 삶의 선배를 앞세우고 동료들을 추월하려고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행렬은 질서정연하다.

오직 한 목표, 저들이 나고 자란 그리운 고향을 향해 수 천 km를 다른 교통편 없이 밤낮으로 오직 자기의 양 날개에 의지하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붉게 퍼진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기러기의 행렬을 바라보며, 이제 나의 여생이 얼마이건 저들처럼 자연의 일부가 되어 저렇게 살리라는 바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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