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 죽고난 뒤의 팬티

데스크 칼럼 / 죽고난 뒤의 팬티

[ 데스크창 ]

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7년 02월 24일(토) 00:00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끄만 여자 /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로 시작하는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여자'란 시를 기억하시나요?

우리 시단의 거목으로 20년간 서울예대 교수로 재직하며 젊은 시인과 소설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오규원 시인이 며칠 전 별세했습니다. 만성폐쇄성폐질환이란 희귀병으로 오랜 투병 끝에 별세한 고 오규원 시인은 병상에서 제목이 없는 4행시 한 편을 남겼습니다. 오 시인은 간병 중이던 제자의 손바닥을 찾아 손톱으로 시를 한 자 한 자 새겼다고 합니다.

"한적한 오후다 / 불타는 오후다 /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 나는 나무속에서 자본다"

시인의 장례식은 "나는 나무속에서 자본다"라는 본인의 유작시처럼 수목장으로 진행됐습니다. 본래 시인은 의식을 잃기 전까지 화장해달라고 했는데 유족들이 수목장으로 결정했다는 겁니다.

시인의 수목장 기사를 보며 '더 잃을 것이 없는'이란 시구(詩句)가 내내 입가에 맴돌면서 새삼 웰 다잉(well-dying)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웰빙 (well-being) 열풍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우리나라도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습니다.

통계청이 지난해 3월 1백세 이상인 9백61명 중 7백9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의 가장 큰 소망은 "편안히 빨리 죽는 것"(23.8%)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선 죽음을 준비하는 웰 다잉 교육이 사회교육으로 체계를 잡은 지 오래입니다.

우리나라도 최근 웰 다잉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아름다운 재단에선 '아름다운 이별학교'를 개설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고 죽음을 준비하며 다음 세대가 살아갈 이 사회에 남길 정신적 유산을 준비하자는 취지로 개설된 이 프로그램은 '인생' '이별' '나눔' '유언' 등 4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먼저 인생 수업은 자신의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며 살아온 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 날을 계획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화해와 용서를 청합니다. 그 다음 이별 수업에선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나눔 수업에선 아름다운 기부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 이후에도 삶의 가치가 지속되는 사례들을 둘러봅니다. 마지막으로 유언수업은 죽음을 준비하는 법적 절차를 배우고 자신의 유언장 작성도 합니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하략)"(오규원 '죽고난 뒤의 팬티')

산 사람도 아닌 죽은 사람의 부끄러움, 죽은 자의 속옷이 깨끗한지 여부에 신경이 쓰인다는 이 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웰 다잉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문턱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됩니다. 미리 죽음을 준비하고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앞으로의 삶을 후회 없이 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바로 웰 다잉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웰 다잉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웰빙의 역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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