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안개

푸른 안개

[ 음악에세이 ] 유혜자의 음악에세이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6년 05월 25일(목) 00:00
30년만에 찾아온 안개 낀 동네는 낯이 설다. 산자락을 끼고 높이 외따로 있던 여학교였는데 담장밑까지 들어찬 건물들과 함께 안개에 묻혀 있어서 한참이나 헤맸다. 학교를 중심으로 어림짐작해서 친구네 집이 있던 언덕 쪽으로 올라가니 부동산 중개소, 주택재개발추진위원회 간판이 붙어 있는 작은 빌딩, 조금 밑으로 '슬기어린이집'이라는 간판이 드러난다. 이쯤 친구네 집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친구는 살던 자리에 슬기어린이집이 세워진 것을 알면 즐거워하리라는 생각으로 서 있는데 피아노 소리가 울려온다. 너무나 친숙한 멜로디, 아직 등교시간이 멀었는데 학교에서 음반을 틀어놓은 것이다.

   
정서함양에 도움이 되는 모차르트(Mozart, Wolfgang Amadeus 1756-1791)음악이라 나같은 행인에게도 맑은 꿈을 일깨워주려는 것일까.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0번(d단조), 2악장의 선율은 음악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친근감이 드는 음악이다. 피아노를 치는 소녀의 모습이 연상된다.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이 연습을 게을리 해서 꾸중들은 후, 눈물을 훔치면서 치기에 알맞은 곡이다. 맑고 깨끗한 작품이 밝은 이성을 찾아줄 듯 하다. 꾸중들은 것이 억울하고 자기편이 없어 우울하던 아이에게 모차르트는 따뜻한 위로가 되고 친구가 되어준다. 그러나 단순한 듯한 음악이 진행되면서 한없는 쓸쓸함도 안겨 준다. "단순하게 보이는 모차르트의 음악 속에 숨어 있는 복잡성을 찾아내는 것이 평생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한 모차르트의 신봉자 안네 소피 무터의 말을 대충 짐작할 것 같다.

피아노의 신동으로 유럽을 풍미하던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분신처럼 사랑해서 자신이 연주할 피아노 작품을 많이 작곡했다. 여섯살 땐가 행진곡을 한번 듣고 그 자리에서 즉시 훌륭한 변주곡으로 연주해서 놀라게 한 실력으로 독주곡을 많이 썼다. 열 살에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을 쓴 그는 짧은 생애에도 27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몇 곡은 편곡이지만 20번은 극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로맨틱하면서 슬프고 무언가 호소하는 느낌을 준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자식을 혹독하게 훈련시켜서 훌륭한 연주가, 작곡가로 성공시킨 예로 거론된다. 그는 아들이 피아노협주곡 20번 초연에 성공하자 모차르트의 누나 나네르에게 "모차르트가 무대에서 사라질 때까지 황제께서는 모자를 들고 고개를 흔들며 '브라보 모차르트'를 외치셨다 …(중략)… d단조의 성공적인 작품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이곳 서울로 이사왔던 친구네는 객지 생활하는 내게 친척보다도 따듯하게 배려해주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친구의 어머니는 자신의 세대에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에게 실현케 하려고 노력했고, 내게도 유능한 전문 직업인이 되리라고 부추겨 주었었다. 장녀인 친구에게 너무 큰 것을 기대해서 갈등을 겪게 했다. 끝내 어머니의 마음에 차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더니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

친구는 밤이면 이 자리에서 남산 위에 밝혀진 등불을 보며 우수 어린 동경의 세계를 꿈꾸었다고 했다. 지금은 건물들이 시야를 가려 그마저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친구와 내가 꿈꾸던 세계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지금쯤 푸른 안개의 끝자락에서 못 다한 꿈을 실어보내고 있을까.

안개가 걷히지 않은 비탈진 길을 내려가며 마음도 후미진 계곡을 더듬는다. 나를 찾아가기 위한 기나 긴 여정의 미로에서 빛과 그림자로 스며드는 모차르트. 조금 전에 듣던 따스하고 로맨틱하던 2악장과는 달리 어두운 정서지만 강렬한 3악장이 흐르고 있다. 올해가 탄생 2백50주년이어서 기념행사와 연주회가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지만 수 백년이 더 지나도 마르지 않을 모차르트의 혼이 담긴 강력한 힘을 느껴본다.

뒤를 돌아보니 푸른 안개 속에서 학교의 실루엣이 드러나고 여학생들 몇몇이 학교로 들어간다. 쥐어지지 않아도 빛과 기쁨으로부터 떼어놓곤 하는 안개. 저 너머의 추억으로 이끌던 안개는 어떤 계시에 따르는 듯 푸른 숲 속으로 훠이훠이 몰려가고 있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