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소식

신록소식

[ 산방일기 ] 장돈식의 산방일기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6년 05월 18일(목) 00:00
박(朴) 문우(文友)가 신록소식을 물어왔다. "신록소식이 궁금하시군요. 나의 산방은 해발 7백 고지라서 평지보다는 한달 가까이나 신록이 늦습니다. 지금에서야 진달래가 지고 철쭉꽃이 흐드러졌습니다. 바다에는 파도가 있듯이 산야에는 녹색의 결이 있습니다. 가을의 단풍이 설악산에서 아랫녘으로 내려가는 속도가 하루 25km 쯤 된다지요?. 신록은 좀더 성급한지 아침과 저녁이 알아보게 다릅니다.

   
3월에서 4월초에 신록을 부르는 소리가 있습니다. 수꿩의 "꺽! 꺽!", 거센소리가 앞 뒷산에 메아리치는 소리죠. 나의 일상의 아침등산로를 오르노라면 갯버들의 꽃인 어린버들강아지가 아침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입니다. 좀 굵은 가지에는 뒷산에 사는 꿩 가족이 아침식사를 하려고 내려와 있습니다. 수꿩이 아직도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아래, 까투리(암꿩) 여섯 마리를 대동하고 나타나서 참 열심히 버들 꽃을 뜯어먹습니다. 다행인 것은 겨울을 나면서 작년에 맺은 풀씨나 나무열매를 다 먹었을 무렵에 이 새싹은 저들의 긴한 양식거리입니다.

나와는 친숙한 이 가족은 작년의 자식농사가 잘되어 십여 식구였으나 겨울동안 젊은 수컷은 다 내보내고 까투리들만 데리고 있는 겁니다. 다음은 어린 까투리들이 낯선 수컷을 따라 나가겠지요. 그렇게 해서 근친번식을 피해가는 오묘한 법칙을 저들은 알고 있답니다. 내가 저들에게 좀 섭섭한 것은, 작년에 농사지은 옥수수밭을 이들 가족들이 먹으러 오기에 저들이 겁내는 개들은 붙들어 매어 놓고, 옥수수 수확은 포기를 하면서 이들 꿩 가족들에게 배려를 했었죠. 그런 마음 씀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는 척은 않는 겁니다.

뭐니뭐니해도 신록의 백미(白眉)는 낙엽송이 아닐까요. 4계절 푸른 솔이나 잣나무와는 달리 가을에는 자잔한 잎에 단풍이 들지요. 숲속 길을 정다운 사람과 걷노라면 늦가을 한줄기바람에 눈보라처럼 날리는 황금색 낙엽이 어깨에 싸이는 낭만이 있지요. 그러나 겨우내 죽은 것처럼 회색이던 숲이 봄 3월 중하순 경 새잎이 돋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아침과 저녁이 다르게 온 숲, 전 산야가 밝은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가는 과정을 바라보노라면 호흡이 멎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철쭉꽃이 질탕(跌宕)합니다. 진달래보다 내가 철쭉을 더 사랑하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진달래는 너무 성급히 꽃을 피우느라 잎이 돋기를 기다리지 못합니다. 온 몸이 진분홍, 온 산이 진달래 일색을 이루는 성깔은 마치 요즈음 과잉노출로 보는 이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철부지 아가씨들 같습니다. 철쭉은 다릅니다. 이곳에서는 4월말에서 5월초에 걸쳐 느긋이 초록잎의 뒷받침을 받으며 화려하게 피우는 철쭉은, 흐드러지게 성장(盛粧)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여인에다 비길 수 있을 겁니다.

이전세월 이맘때 방그러니의 철쭉은 대단했었습니다. 초동(樵童)들의 땔감등 짐에는 반이 넘게 철쭉이었으니까요. 그러던 것이 우리네 가정의 땔감이 무연탄, 석유, 가스로 바뀌면서 산림녹화가 성공하면서 키 큰나무들 아래의 철쭉 같은 키 작은 나무는 숨이 막혔습니다. 올해는 저 높은 곳, 바위 설렁이에 다른 나무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곳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꽃을 피웠을 뿐입니다. 옛말에 '人長之德 木長之敗'란 말이 있습니다. 즉 '사람은 큰사람의 덕을 보지만 나무는 큰 나무 덕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겠죠. 이곳 계곡 생태계에도 변화가 온 것입니다. 아무리 정글의 법칙이라 해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산야가 짙푸른 초여름과 대지(大地)가 꽃으로 웃는다는 신록과의 경계는 있을까요? 있습니다. 나는 대추나무의 잎이 돋으면 여름이라고 여깁니다. 경험이 적던 무렵, 집터에 서있는 대추나무가 죽은 줄만 알고 벨 뻔 했던 때도 있습니다. 이 게으른 나무가 지금 잎눈을 돋우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제는 여름이 가까웠습니다. 도시인에게는 너무 먼 자연인가요? 신록을 묻지만 말고 한번 오시지요."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