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완> 한국교회에도 변화의 은혜를

WCC<완> 한국교회에도 변화의 은혜를

[ 교계 ] 차기 총회 유치 가능성등 성과와 함께 산적한 과제 확인

김보현 기자 bhkim@kidokongbo.com
2006년 04월 30일(일) 00:00

'하나님이여 은혜로 한국교회를 변화시켜 주소서'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운동과 함께 해 온 역사는 기록만으로도 매우 밀접한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 세계개혁교회연맹이 출범할 때도 한국교회는 대표단을 파송했고, 망국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선교사대회 때 역시 한국교회 대표는 그 자리에 함께 했다.

뿐만 아니라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가 암스텔담에서 공식 출범할 때 해방 후 재건에 힘을 쏟던 한국교회였지만 역시 대표단을 파송해 세계교회와 함께 하는 한국교회의 여정을 계속했다.

이와 함께 가장 최근에는 과거 우리 나라에서 선교사를 파송했던 런던선교회(LMS)의 후신인 세계선교협의회(CWM)에도 회원 교회로 가입, 세계와 지역의 주요한 에큐메니칼 기구의 동반자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수많은 인재들이 유수한 세계연합 기관들에 지도자로 역할을 감당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과 아시아기독교회협의회(CCA) 세계선교협의회(CWM)를 비롯해 수많은 해외 신학 기관 등에 젊은 세대 인재들을 실무자로서 파송해 짧은 기독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보유한 탁월한 지도력으로 세계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여정과는 대조적으로 한국교회는 여전히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흐름은 물론이고 국내 교회들 간의 협력과 일치 관계에 있어 국내적으로는 물론이고 심지어 해외에서조차 부끄러운 모습들을 노출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제9차 총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이러한 한국교회의 현실들을 노출시킨 총회였다고 할 수 있다.

목적지는 갖지만 여정은 다르다(?)
이번 총회가 열린 포르토 알레그레는 우리나라 면적에 40배에 달하는 브라질의 남부지역 주인 리오 그란데 술 주의 수도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지와 인접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지구 정반대편에 위치한 이곳까지 여행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여정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번 대회에 참석한 공식 총대와 업저버를 비롯한 한국 대표단들은 출발 일정이 다른 문제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여정으로 출발,현지에 모여들었다.

이 가운데 주된 노선은 유럽의 프랑크푸르트를 거쳐서 브라질 사웅파울로를 거쳐 도착하는 여정과 미국을 거쳐 역시 사웅파울로를 경우하는 노선이었는데 물론 여기는 미국 비자의 유무도 작용했겠으나 모두가 WCC 이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소속된 회원 교단의 대표들과 참석자들이면서도 여정을 선택하는 데에는 개별적 혹은 소그룹별로 저마다 다른 여정을 통해 현지에 도착했다.

참가자와 실무자들 누구에게 책임 지울 일도 아니고 더구나 이번 회의를 참석하는 데 있어 여정의 선택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사안이라 할 수 있지만 이런 대화 부족과 독자적 '행보'는 총회가 열리는 기간동안 현장에서까지 그대로 이어졌다는 데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모두의 목적은 이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의 한국교회 이전에 교파 혹은 그 밖에 어떤 이름과 의미로 서로의 여정에 무관심하고 또 '독자적'이고자 할 때 이번 총회에서 '변화'의 구체적 결실로 제시했던 '연대와 나눔'의 가치는 찾아질 수도 회복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국제 언어는 통해도 한국말은 서툴다(?)
WCC 총회와 같은 국제 회의에 참석한 한국교회 대표들이 세계 어느 교회 대표들보다 고통 받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언어 문제일 것이다. 세계 공통어들에 대한 통역이 이뤄지고,지난 제8차 총회에서는 한국어 통역 문제가 거론되기는 했다고 하나 이번 한국 참석자들 대부분은 영어에 의존한 의사 소통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회의장 안팎에 흐름들을 따라가는 데 있어 언어의 능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전체 회의는 물론 소규모 회의장과 토론장에서조차 입구마다 통역기가 지급되고, 공식적인 통역이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비공식적인 통역을 즉석에서 제공하기 위해 청중들의 사용언어를 파악하고 심지어는 발언자마다 자신이 사용할 언어를 발언 전에 밝히는 것을 관행화 하고 있다.

한국교회도 이제 국제 활동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만큼 언어능력을 갖춘 지도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이번 회의 석상에서도 준비된 발제는 물론이고 전체 회의 석상에서도 개인과 한국교회의 입장을 떳떳하게 천명하고 나아가 능숙하게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 총회장에서 한국 대표들에게 가장 소통이 어려운 언어가 있었다면 그것은 영어도 포루투갈이나 스페인어도 아니라 바로 '한국어'였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차기 총회시까지 7년 동안 활동할 중앙위원을 추천하는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함께 반가운 북한교회 대표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그야말로 잔치자리를 준비하는 대화에까지 이번 제9차 총회에서 한국교회 대표들이 보여 준 모습은 그야말로 혼돈의 현장, '바벨'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발언자가 되고 통역자가 되어야 할 대표들은 대표들 대로 실무자들은 실무자들대로 먼저 통역은 물론 대화의 기본이 되어야 할 상대방의 의사를 경청하지 않고 자신의 소견대로 통역해서 전달하는 우가 거듭되었고, 이는 지난 총회 이후 본 교단과 협력 교회를 갖고 다자간 협력 속에서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조정하며 기대감을 가졌던 가까운 동역 교단 관계자들 뿐 아니라 총회 주변에서 한국교회 대표들의 움직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이들에게는 쉽게 감지되고 노출된 또 하나의 추문을 남기고 말았다.

우리는 우리의 원칙과 절차를 따르련다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의 한 마당 잔치와 축제라 할 수 있는 WCC 제9차 총회 현장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완전 불식시키지 못한 데는 물론 국내적으로 사학법 문제나 기타 연합사업에서 빚어진 이해 차이가 이어진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3개 교단이 참여하는 한국교회에 1백50명 중앙위원 가운데 두 자리만이 배정되는 데서 이미 불행(?)의 씨앗은 심겨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번 총회에서도 이 문제로 인한 진통이 오래고 깊었다.

솔로몬과 같은 지혜로운 지도자의 부재탓인지 에큐메니칼운동에서 일반화 된 '균형과 적임자' 위주의 인선 원칙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개 교단이 그 때 그 때 임시 방편으로 내세우는 원칙이나 심지어는 원칙을 무시한 합의를 남발하고 또 제각기 해석하는 과오를 노출시켰다.

안이하게 생각하면 한국교회에 3명의 중앙위원이 배정됐더라면 분쟁이 없었으리라 기대할 수도 있지만 이 난제(?)를 풀어가는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바라보자면 세 명의 대표자리가 배정되면 과연 어떤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지 모른다는 것은 단순한 기우라고만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세계교회는 한국교회 대표들이나 참석자들을 대할 때 그저 '한국에서 왔는가'라고 물을 뿐이다. 물론 개중에는 남북에 대해서 묻고, 교단명을 거론하는 인사들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교단 명을 앞세우는 모습은 웬지 우리 정체성의 최우선이 한국교회인가 예장 기장 혹은 기감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갖게 한다.

'우노 꼬레아(한국은 하나다)' 남과 북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던진 대답에 돌아오던 미소는 이러한 한국교회를 향한 기대이자 우리가 주어야 할 참된 답이 아닐까.

브라질보다 먼 곳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브라질은 정말로 먼곳이다. 회의 기간 중 현지에서 발효되던 섬머타임이 해제되자 시간은 정확히 12시간 차이가 나고 위도상로도 한국과 비슷하니 그야말로 한국의 꼭지점이 되는 곳, 둥그런 지구에서 가장 정반대가 되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브라질 내에 5만에 달하는 한국 교민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거리와 공항등지에서 쉽사리 우리 기업들의 상품 광고를 보게 되고, 숙소와 식당에서는 간단한 한국말로 인사하는 현지인들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것을 보면 양국의 심리적 사회적 거리는 과거에 비해 많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총회에도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강영섭위원장을 비롯해 관계자들이 참석해 남북한 합동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함께 식사를 나누며 친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양국 대표자들 사이에서는 수차례 만남을 통해 형성된 친분으로 스스럼 없이 안부를 묻고 서로를 위한 덕담도 나눌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 이곳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바라볼 때 가장 멀게만 느껴진 곳이 한국교회였다면 지나는 자기 비하요 자조일까.

남북합동예배를 준비하면서 한국교회 참석자들은 물론 교단의 관계자들까지 예배 순서를 직전에서야 통고받아야 할만큼 대화와 협의의 기본이 실종되고, 그로 인해 이번 총회 기간 중 '가장 의미 있는 예배이자 가장 준비 않된 예배'라는 참석자들의 성토를 받아야 했던 것 역시 한국교회가 한국교회에게 얼마난 먼 곳인가를 보여준 단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세계교회는 일치를 위해 기득권의 희생도 감내하고, 참된 삶의 축제(Feast of Life)로서의 교회를 구현해 가기 위해 세상과 맞서 싸우고 각고의 고통을 감내하자는 결의를 확인하는 자리에서 한국교회는 여전히 교파주의의 한계 속에 과연 차기 총회의 주최를 자임할 수 있을까 자칫 그 기대감마저 멀어질까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의 심정이 더욱 간절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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