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교향곡

봄의교향곡

[ 음악에세이 ] 유혜자의 음악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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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3월 28일(화) 00:00
글 유혜자 그림 장주봉

시든 이파리를 잘라버린 지 2년이나 지난 양란 화분에서 뜻밖에 세 촉의 싹이 올라왔다. 봄 햇살이 숨죽였던 산과 들에나 새움을 틔우는 줄 알았더니 죽은 화분에서 생명의 싹이 돋아나게 하니 경이롭기만 하다. 무엇이 잠든 혼을 일깨웠기에 피어날 수 있었을까. 낙담했던 일들도 눈물겨운 기쁨으로 바뀔 수 있는 봄이다.

   
슈만(Schumann, Robert 1810-1856)과 클라라의 잘 알려진 사랑이 생각난다. 슈만은 스승의 딸 천재 피아니스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나 스승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친다. 나지막이 엎디어 어둠과 추위를 견디어낸 이들에게 봄이 선뜻 빗장을 벗겨내 주지 않듯이 슈만은 소송까지 벌여 이긴 후, 서른 살에야 결혼을 하고 약동하는 봄을 맞았다.

클라라가 성악곡, 교향곡 쓰기를 권유하고 뛰어난 영감을 주어 슈만은 음악의 전환기를 맞았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좋아했고 슈베르트가 개척한 가곡을 한층 예술적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결혼한 해에 아내에게 바친 '미르테르의 꽃' '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 등 음악사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노래를 포함, 1백여 곡의 가곡을 만들었고 다음해에 제1교향곡 '봄'(B플랫장조, 작품38)의 꽃을 피웠다.

그래서인지 교향곡 '봄'은 호른과 트럼펫이 함께 연주하는 서주가 축하의 팡파르 같다. 눈부신 금관의 황제가 대신들을 거느리고 걸어나오는 모습이 연상되는데, 결혼에 성공한 슈만의 마음과 자축의 표현이 아닐까 엉뚱한 짐작이 앞선다. 서주가 지나서 나오는 호른과 현의 부드러운 화음은 혈관에 스며들어 흐르는 피도 따뜻해질 듯하다.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빠르고 격렬한 선율의 변화가 봄이 평화롭게 다가오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 같아, 결혼 10여 년 후 슈만이 정신병으로 투병하다 46세에 숨진 불행이 떠오른다.

슈만은 결혼하기 전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도를 찾아갔다가 슈베르트의 유품들 속에서 미발표 교향곡 9번을 발견하고 친구 멘델스존에게 초연을 하게 했다. 멘델스존 지휘의 성공적인 초연을 들은 슈만은 "갖가지 비할 데 없는 생명이 나타나 있으며 슈베르트 고유의 로맨티시즘이 넘쳐흐른다"고 감동하여 자신도 교향곡을 쓰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결혼 후 아내의 권고에 용기를 냈던 것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서점에서 책을 많이 읽었고 탁월한 문필가였던 슈만은 낭만파 시인 아돌프 뵈트거(A. Bottger)의 '봄의 시'의 분위기에 자극을 받고 거기서 걸러진 이미지를 교향곡 속에 재현하려 했다. 표제를 '봄'으로 하고 각 악장마다 봄의 시작, 황혼, 즐거운 놀이, 봄의 고별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빠른 시일에 서정적인 매력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제1악장 '봄의 시작'은 도입부에서 울리는 금관악기의 팡파르가 봄을 깨우친다. 보라빛, 다홍빛 봄꽃의 은은한 향내도 다가올 것 같다. 봄 저녁의 로맨틱한 기분이 드는 2악장 '황혼', 3악장 '즐거운 놀이'는 약동하는 힘이 있다.

마지막 악장 '봄의 고별'은 기쁘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생명의 환희가 계속되나 봄을 여의는 애절함이 깔려 있다. 어느덧 우리들의 봄도 따뜻한 대기 속에 증발되는 섭섭함을 생각나게 한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온갖 능력을 타고나서 지니고 있으나 그걸 이용 못하고 일생을 마친다고 한다. 클라라는 슈만에게 숨겨져 있던 가능성을 일깨워줘 인생의, 음악가의 봄을 꽃피우게 해주었다.

다가온 봄, 죽었던 화분에서 싹튼 것을 보며 뇌티히가 '빛과 그림자'에서 "봄의 태양이 빛나면, 골목의 씨앗은 싹트지 않고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세상이 차더라도 꽃이 핀다"고 한 것처럼 슈만과 클라라, 그 세기적인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 보게 된다. 슈만의 결혼은 그 인생의 봄이요 전부이기도 했다.

생동감과 다양성 외에 내 안에 이용 못하는 능력이 있는지 기대하며 슈만의 교향곡 '봄'을 듣노라면, 어느새 봄날이 이울어 어스름 속의 신비한 평화가 주위에 번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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