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의 가을은 간다

산방의 가을은 간다

[ 산방일기 ] 산방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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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06일(화) 00:00
장돈식

산방의 가을은 간다. 출필고반필면 (出必告 反必面)이란 말이 있다. 가면 간다, 오면 온다고 고해야 한다는 말이다. 산방의 가을도 올 때는 오색 단풍으로 곱게 단장하며 오더니 갈 때는 스산한 바람에 실려서 가고 있다. 앞산 비탈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 닥친다. 수직(垂直)에 가까운 비탈에 버티고 서서 계절을 연출하던 숲의 많은 마른 잎들이 가지를 떠난다. 일시에 날아올라 골 안을 소용돌이치며 떠도는 장관을 나 혼자 본다. 한 겨울에 내리던 함박눈이 저 밑 골짜기에서 정상으로 올려 부는 바람을 맞으면 저런 모양이다.

   
다람쥐 먹이를 주어야 한다. 그들이 좋아하는 옥수수알갱이를 매일 정자귀퉁이에 놓아준다. 겨울을 모자람 없이 나려면 꽤 많은 양식이 필요하다. 이상하게도 놓아주는 먹이는 없어지는데, 요 며칠 째 내가 담돌이라고 이름 지어준 다람쥐네 가족들은 보이지를 않는다. '그렇군, 지난 수일 기온이 많이 내려갔었지...' 나와 눈맞춤 하기 좋은 뜰 잔디밭에다 구멍을 뚫고 한 여름을 나더니 거기는 겨울을 견딜 만큼의 구멍깊이를 팔 수 없었던지 비탈로 둥지를 옮겼다. 그러고 벌써 동면으로 들어간 것이겠지.

저들의 먹이를 주던 장소에 그대로 쏟아주고 눈여겨 보니 겁 많은 산까치가 사람 없는 틈을 타서 다 물어 간다. 새 중에는 드물게 이 산까치가 먹고 남는 먹이를 저장하는 버릇을 지니고 있다. 산을 다니다 보면 가끔 사람이 심지 않은 곳에서 강냉이나 수수의 싹이 돋고, 도토리를 여는 상수리나무 따위가 자라는데 그건 이 새가 묻어 놓고는 잊었거나 생각이 나서 찾아 먹으려 해도 겨울에 눈과 얼음에 묻혀 파먹지 못한 것이 이듬해에 발아(發芽)하는 경우다.

가을 걷이를 한 논을 본다. 온갖 밭곡식이 다 영글어 수확이 끝났다. 그중에는 밭에 심은 토마토, 가지, 호박넝쿨 따위가 성장을 멈추고 널부러져 있다. 일전의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더니 된서리를 맞고 냉해(冷害)를 입은 것이다. 자세히 관찰하면 이들은 원래 우리나라 땅에서 생성된 식물들이 아니다. 호박은 기후가 온난한 인도가 고향이고, 고추, 토마토, 가지 등은 중남미 등 더운 지방의 인디오들이 개발한 식물이라고 한다. 천지창조 이래 이 땅에서 자란 토종식물들은 자랄 때와 생을 마무리 할 계절을 아는데, 이 외래종들은 이런 늦가을이 되어도 이곳 기후에 적응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 가을날에도 낮이 따뜻하면 금세 닥쳐 올 찬 기후를 인정하지 않고 천년만년 살 것같이 줄기를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우리 본래의 것 아닌 식물들의 사는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한다. 현금출납기에서 무작정 돈을 꺼내 쓰다가 신불자(信不者)가 되는 철부지를 보는 것 같기도, 외국으로 나가면 뭔가 좋은 게 있겠지, 종신 (終身) 외인(外人)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민자(移民者)들을 보는 것 같다. 시작에서 얼마간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 끝도 한도 없이 사업을 벌려 나가다가 비참한 종말을 보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뚝!'오동잎 한 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안다고 했던가. 가는 가을을 느낀 붉나무, 업나무, 개옻나무 등은 벌써 잎을 떨구었다. 그 처연(悽然)히 잎이 진 자리가 늦가을이라는 계절에 숨은 쇠락(衰落)과 소멸(消滅)의 이미지를 더없이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눈물을 쏟지 않는 절제된 그 슬픔의 표현은 글자마다 꾹꾹 눌러 쓴 연애편지처럼 아프다. 떡갈나무, 자리알나무 등은 오는 봄 돋을 잎자리가 아직 부실해서인가, 이미 다 마른 잎을 가지에 달고 안달하는 모습이 서글프다. 다 자란 자기 자식을 독립시키지 못하고 끼고 있는 이 나라의 어버이들을 보는 것 같다.

자취없이 가는 계절은 한 해가 지나면 또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만날 수 없을 이 가을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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