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여정에서

기나긴 여정에서

[ 음악에세이 ] 유혜자의음악에세이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5년 10월 19일(수) 00:00
유혜자

지난 9월 14일 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로비에서 '베토벤의 소나타 리사이틀'을 막 끝낸 백건우씨의 팬 사인회가 있었다. CD에 사인을 받으며 나는 "라흐마니노프나 포레보다 베토벤의 음악을 나중에 연주하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뜨거운 맥박으로 삶의 전부를 내바치듯 한음 한음에 쏟았던 열정이 식지 않은 듯 상기된 얼굴의 백건우씨가 들려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준비기간이 길었던 셈이지요."

   
'삶은 산다는 것이기보다 꿈꾸는 것'임을 보여주고, 목표를 이뤄가는 이가 갖는 아름다운 모습을 본 순간적인 만남이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에 산 '베토벤 소나타' CD와 프로그램에 있는 백건우씨의 사진에는 주름이 너무 많았다. 내년에 회갑이라고는 해도 격렬한 연습의 결과 같아 안쓰럽던 마음이었으나 그것을 불식시킬 만큼 실제로 본 그의 얼굴은 화사하고 해맑은 소년 같았다.

이날 마지막 연주곡인 소나타 제23번 '베토벤의 소나타 가운데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열정'을 연주할 때는 더욱 경건하게 시작하는 듯 했다. 중량감 있는 1악장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격렬하게 건반을 휩쓸다가 조용한 끝 부분을 마치면서 연주자는 고개를 푹 떨구더니 일어날 줄을 모른다. 평소 현란한 몸짓의 그가 아니기에 당황한 관중들이 많았으리라. 정돈된 느낌의 2악장이 시작되기까지 불과 몇 초 동안이었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지. 2악장에서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끝악장의 분방한 열정이 용솟음칠 때는 찬연한 불꽃이 온몸에 끼쳐오는 듯했다. 빠르고 격렬한 연주로 피아노 건반 윗 부분에 비치는 손 그림자가 열 개도 더 되는 것 같아 눈과 귀를 압도하는 것이었다.

인터뷰에서 '베토벤 음악에는 대단한 힘이 있다, 소리가 큰 것이 아니라 내용의 힘 때문'이라고 했던 그가 '열정'을 끝냈을 때, 빈 자리 없이 연주장을 메웠던 관중들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이 인식하고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의 스승이었던 빌헬름 켐프의 연주 음반과 선배격인 아쉬케나지의 음반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뜨거운 감동으로 온몸이 충전되는 것이었다. 연주 현장에서의 분위기 덕분이었을까.

예술가들은 수평선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를 동경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알 때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테두리를 좁게 긋지 않고, 또 자신을 가두어 두었던 상태를 벗어나고자 넓은 세계를 꿈꾼다. 향상을 위해 멀고 긴 여정이 놓여 있다는 것을 겁내지도 않는다.

백건우씨도 대 여섯 살에 피아노를 시작해서 기나 긴 여정을 지나왔다.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베토벤이라는 큰 산을 넘고 싶어하지만 힘든 일이라고 한다. 베토벤의 소나타 32곡 전곡 녹음은 그의 스승 빌헬름 켐프가 일찍이 해냈고, 다니엘 바렌보임, 리처드 구드와 알프레드 브렌델, 아슈케나지로 손꼽을 정도의 사람들이 해냈거나 녹음 중인데 동양인으로는 백건우씨가 처음이다.

올봄 세계적 음반사인 데카(DECCA)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에 들어가 1차분으로 16번-23번까지의 CD 석 장을 내고 9월8일부터 국내에서 6차례 독주회를 열었다. 나머지 음반은 2007년까지 10장의 CD에 담을 예정이다.
"젊어서는 베토벤의 음악이 참 어려웠다. 이제 비로소 그의 음악을 이해하고 연주할 때가 된 것 같다" "여기저기 여행하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나도 피아노의 근본인 베토벤의 소나타로 돌아왔다"고 말한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떠오르는 것이 있다. 20여 년 전 미당 서정주의 시를 좋아하는 백건우씨 내외의 낭송음반으로 윤정희씨 낭독에 백건우씨가 배경음악을 연주한 '국화 옆에서'구절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봄부터 울었고 천둥도 먹구름에서 그렇게 울었던" 날들을 지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의 국화처럼 완성의 경지에 이른 연주가의 더욱 밝은 앞날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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