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중동리교회

중도의 중동리교회

[ 믿음으로떠나는여행 ] 믿음으로 떠나는 여행(23)-섬 교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를 찾아서(1)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5년 09월 07일(수) 00:00
복음의 씨앗이 곳곳에 뿌려질 때, 자칫하면 소외되기 쉬운 곳 중에 하나가 섬 지역이다. 섬은 여건상 미신이 강할 뿐 아니라, 교통이 불편해서 선교활동을 하는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섬마을에 복음전파를 위해 생명을 다해 헌신한 분이 있다.
   
1933년 9월 설립된 중동리교회. 성결교의 대표적인 여성 순교자인 문준경 전도사가 세웠다.
문준경 전도사. 여인의 몸으로 그가 설립한 교회만도 신안군의 섬 일대에 10여 곳이나 되고, 그 교회에서 김준곤, 이만신 목사 등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성결교의 대표적인 여성 순교자이도 한 그녀는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섬 교회의 어머니'라 불릴 만큼 큰 위치를 차지한다.

문준경 전도사가 사역을 하던 증도에 가기 위해서는, 무안반도 남단에 있는 지도읍 송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한다. 차를 세워놓고, 배를 기다리는 동안 바다를 바라본다. 저 바다 너머 한 섬에서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눈물의 전도자가 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아골 골짜기 빈들에도 나아가기 두려워하지 않았던 우리네 영적 어머니와 같은 분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가슴은 이내 뛴다. 바다 내음을 맡으며, 잠시라도 머리를 식힐 때쯤이면, 배는 벌써 증동리 선착장에 도착한다. 차를 부려 다시 십 리 정도 마을로 들어가면, 첫 번째 목적지인 증동리 교회에 도착하게 된다.

증동리교회는 1933년 9월에 세워졌다. 처음 문 전도사가 이 마을을 전도할 때쯤에는 예배 처소가 없어서 성도들의 집을 오고가며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예배 장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결국 성도들은 예배당을 짓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게 되었고, 문 전도사의 시숙 정영범이 먼저 발벗고 나서 육지에서 중고 건축자재를 구해 증동리 선착장까지 운반하였다. 교인들은 기뻐했으나, 정작 문제는 교회를 지을 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가운데, 정영범의 손녀인 옥순이 정영범에게 찾아가 말했다.

"할아버지,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도 멀지 않았는데, 우리 집이 먼저 본을 보여서 성전터를 바쳐요. 우리 집의 텃밭이 교회가 세워지는 성전터가 된다면 이런 영광스런 일이 어디 있어요?"

손녀의 뜻밖의 제안. 정영범은 그 의견을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땅을 바치게 된다. 교회를 지을 자재를 구하기 위해 육지까지 나아가 동분서주했던 그가 이제는 예배당을 위한 터까지 바친 것이다. 터가 생기자, 교회를 짓는 일이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교인들은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다가도 날이 저물면 선착장에 가서 건축자재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새벽빛이 마을에 비출 때까지 기왓장과 나무들을 나르고 또 날랐다. 여인들은 기왓장을 머리에 이고, 아이들도 손에 나무 한두 점씩 들고 십리길을 걸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1개월 남짓한 기간동안 여인네들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굳은살이 박힐 정도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다한 폭이었다.

하지만, 증동리 한가운데 우뚝 솟은 십자가만 바라보면 이런 고생쯤은 충분히 잊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때 일을 기억하는 성도들은 교회를 지날 때마다 입가에 도는 미소를 참지 못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기억이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었던 것이다. <계속 designtimesp=7092>

박귀용목사
/누가 성지교육원 안양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