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생리

숲의 생리

[ 산방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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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9월 06일(화) 00:00
글 장돈식
그림 김지혜

   
산방(山房)을 지을 때였다. 정(定)한 터는 나무와 푸새가 우거진 숲속이었다. 덤불을 헤치고 곡괭이를 내리쳐 파내는데, 숨이 확 막히도록 풍기는 냄새는 향긋한 푸새냄새나 한약방의 건재(乾材)에서 풍기는 냄새는 아니었다. 지독한 곰팡내와 죽은 식물이 썩는 퀴퀴한 냄새였다. 파 헤쳐진 흙밥에는 수많은 뿌리가 뭉쳐지고 뒤엉켜 흙의 수분과 양분(養分)을 차지하기 위해 처절(凄切)한 쟁탈(爭奪)을 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흔히,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숲을 보지 말고 나무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녹화사업(綠花事業)이 잘 되어서 산야에 가득한 수림(樹林)이 흙의 유실(流失)을 막고 푸르른 국토가 우리에게 주는 덕(德)은 많다. 그러나 밀집돼 있는 나무나 풀, 그 한 포기마다 겪는 삶의 고달픔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가뭄이라도 들면 서로 물기를 빼앗아야 살아남고 거름기는 금새 동이 난다.

인장지덕 목장지패(人長之德 木長之敗)란 말이 있다. 사람은 큰 사람의 덕을 보지만 나무는 큰 나무의 덕을 보지 못한다는 뜻일 게다. 키가 낮은 관목(灌木)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교목(喬木)의 그늘에서 햇빛부족으로 창백해지고 웃자라 제 명을 살지 못한다. 그렇다고 키 큰 나무라고 모두 안주(安住)하고 번영하는 것도 아니다. 나무를 기어오르는 넝쿨들이 덮쳐 숨을 막아 고사(枯死)시킨다. 이전에는 거목(巨木)이 쓰러지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뜻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넝쿨식물이 그의 판도를 넓혀 가면 큰 나무가 없어진 자리에도 새로운 싹이 돋을 수 없고, 푸새도 배겨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칡, 다래, 머루 등은 식물계의 대표적인 폭군(暴君)이다. 이들 넝쿨 성(性) 식물들은 그들끼리 뒤엉켜 삶의 갈등을 한다. 칡(葛)넝쿨과 등(藤)나무 줄기가 서로 얽으면 그것이 바로 갈등(葛藤)이다. 초본과(草本科)에도, 청머루, 며느리밑씻개, 이줄기 같은 넝쿨식물에 뒤덮이면 어떤 식물도 꼼짝없이 사그라진다.

산방 앞, 냇물가에서부터 솟아 오른 절벽이 아슬하게 높다. 그 바위 위에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수령(樹齡)이 백 년을 넘었을 의연(毅然)한 기상(氣象)의 이 나무를 바라볼 수 있는 있어서 좋다. 그런데 이변(異變)이 일어났다. 절벽 밑에서 다래넝쿨이 위를 바라 볼 수 있는 눈이라도 가졌는지, 미터가 넘는 높이의 소나무를 향해 새 순을 올려 보내기 시작했다. 다래의 새 순은 목표물을 붙잡을 때까지는 잎을 내지 않는다. 무게와 바람을 탈 가 봐서 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 뻗는 어린 넝쿨이 그 소나무의 가지나 줄기를 붙잡기에는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다래는 또 하나의 순을 내밀어 먼저 줄기를 감고 오르면서 힘을 보탠다. 그리고 다시 제 삼의 새 줄기를 올려 세 가닥으로 힘을 보태 거뜬히 소나무 가지에 감고 올랐다.
마치 우리나라 재벌들이 자기 계열회사끼리 상호출자(相互出資)하여 경쟁 기업(企業)을 덮쳐 망하게 하는 문어발식 경영을 닮았다.

그대로 두면 어렵게 살아 온 저 소나무의 백년 세월도 끝장이다. 이 무법자의 넝쿨 밑을 끊어 늙은 소나무를 구제해 줄 생각이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본, 선 일대의 자연을 보다가 확인(確認)한 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거의 모든 농토와 산림에는 여러 종류의 넝쿨 식물에 덮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글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생리를 말한다. 그 법칙은 적도(赤道)밑 정글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도시의 화려함 속에도 생존경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있고, 한 강산, 방그러니 계곡의 숲에도 있었다. 인간사회의 부조리를 개탄하며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약자도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적다. '숲의 생리'를 조금 깊이 보게 된 지금은 인간도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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