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의 메아리

골짜기의 메아리

[ 음악에세이 ] 유혜자의 음악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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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7월 26일(화) 00:00
유혜자

   
여고시절 음악교과서에서 본 슈베르트의 사진은 소박한 음악 선생님 같은 인상이었는데 얼마 전 채색화를 보며 수정을 했다. 숲 속 물레방아를 배경으로 맑은 물가 벤치에 오선지를 쥐고 앉아 명상하는 그의 모습은 시인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물가에 풋풋한 풀을 키우는 물소리가 졸졸졸 울려 나올 듯한 그림. 그 물은 시원한 골짜기를 감돌고 들판을 지나 만인들의 마음의 바다에서 뛰노는 슈베르트(Schubert, Franz Peter 1797-1828)의 노래들처럼 생동감이 느껴졌다.

슈베르트는 31세의 짧은 생애에 흐르는 물처럼 쉼없이 솟는 악상으로 아름다운 가곡을 많이 작곡했다. 13살에 작곡을 시작한 그는 교향곡, 빛나는 피아노곡 외 다른 장르의 음악도 작곡했지만, 특히 7백 여 곡이나 되는 가곡을 남겼다. 그에겐 '나의 기도'라는 알려진 자작시도 있을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어서 당시 괴테나 실러 뮐러, 하이네 등 낭만주의 서정시인들의 작품으로 많은 예술가곡들을 낳을 수 있었다. 감정에 호소하거나 자연을 묘사하는 내용에 따라 다양한 노래로 낭만파 독일 리트의 세계를 열었고 가곡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마련했다.

슈베르트의 가곡들은 대부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선율이어서 사랑 받는 곡이 많다. 그런데 돌아가던 해에 쓴 '바위 위의 목동'은 예외이다. 소프라노 리타 시트라이히(Streich, Rita 1920-)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면 어렵고도 눈물겹다. 일자리를 찾아 산골을 떠난 목동이 그 산골짜기에 사는 여인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데 아름다우나 비탄조여서 절절하게 스며든다.

높은 바위에 서서 그리운 골짜기를 보며
노래하면
......
아득히 먼 계곡에서 메아리가 울려온다.
슬픔에 짓눌리고 기쁨이 사라져
이 세상의 소망을 잃고 나 홀로 외로이
......하 략

이런 가사처럼 고달픈 삶, 외로움을 떠올리게 된다. 더욱이 인생의 애환을 터득한 높은 기교의 그윽한 음성에 가슴이 저려온다.

슈베르트의 가곡들은 대부분 자연스럽고 선율이 부드럽고 우아하다. 그리고 무겁지 않은 피아노 반주로 분위기와 배경 묘사를 살리고 가사의 감정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피아노 반주어법을 확립했다는 슈베르트가 12분이나 되는 '바위 위의 목동'에선 클라리넷과 첼로의 반주를 함께 했다. 그리고 전주가 2분 가까이 되고 오페라의 아리아와 같은 화려한 느낌의 변화가 있다. 음악인들은 슈베르트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서양음악의 발전을 50년 이상 당겼을 것으로 보며 오페라를 쓰고 싶어했던 그의 뜻이 이 곡에 담긴 것 같다고 아쉬워한다.

사람은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과 자신이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때가 있다. 슈베르트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양치는 일 뿐인 목동이 산골을 떠나 나가봤지만 뜻대로 안되어 '슬픔에 짓눌리고 기쁨이 사라져 이 세상의 소망을 잃고 외로이'의 내용에 공감해서 이 노래를 만들었을까.

그는 가곡작곡에는 자신 있었으나 오페라를 쓰고 싶어했으면서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밝고 다정한 노래들에서 그의 가난과 질병의 고통을 잊기 쉬운데, 애상적인 노래에서 그런 사실을 상기하게 되고 인생에도 밝은 면만 있지 않다는 진부한 진리를 음미해보게 된다.

일생동안 직업이 없었으나 좋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작곡만 했던 슈베르트, 그러나 일자리를 구하면서 바위 위에 앉아 외로운 노래를 부른 목동처럼 오늘날에도 외로운 구직 청년들이 너무나 많다.

슈베르트를 '고전파와 낭만파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골짜기에 피는 아름다운 꽃이요, 맑은 시내물의 흐름'이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깊은 골짜기에서 더위도 식히고, 외치는 사람들의 소원이 골짜기의 메아리로 울리고 다 이뤄지면 좋겠다는 음악 외적인 바램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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