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엔 하얀 꽃'

'청산엔 하얀 꽃'

[ 산방일기 ] 장돈식의 산방일기

이경남 기자 knlee@kidokongbo.com
2005년 07월 19일(화) 00:00
장돈식

   
이른 아침 기상하며 문을 열어 제친다. 뜰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침공기가 밀치고 들어온다. 거기엔 우아하고 그윽한 꽃 향이 섞여있다. 앞산에 가득 핀 산목련이 내뿜는 향이다. 이 꽃은 한 그루만 피어도 골 안에 그 향이 진동한다. 요즈음 수많은 나무가 한꺼번에 피었으니 짐작할 만하다. 이 나무는 잎이 완전히 돋은 후에 꽃을 피우는 게 시중 가정화단의 목련과 다르다.

마당가를 스치는 개울에서 피어오른 엷은 안개가 그 꽃나무들을 감쌌는데 거기에 놀랍게도 수 백, 수 천 마리의 흰 나비가 꽃 위를 분주히 날라다닌다. 산협의 햇발은 늦다. 아직 아침 햇빛이 없는 검푸른 배경에 흰 나비들의 군무는 운치를 넘어 신비롭다. 자규(子規)화에는 호랑나비만 오는 건 아는데, 산목련꽃에는 흰 나비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청산에는 다른 하양도 있다. '쥐다래'다. 외양은 여느 다래와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5월초에 피우는 꽃이 너무 빈약하다. 그 꽃으로는 수정시킬 중매쟁이, 벌과 나비를 불러 모으는 데 불안 했던지, 꽃 근처의 온 잎을 하얗게 변색 시킨다. 식물학에서는 그런 잎을 의사화(擬似花)라고 하며 우리 주변에도 그런 잎이 꽤 많다. 수국의 탐스러운 꽃송이는 꽃이 아니고 잎이다. 에델바이스도 그런 잎이다.

나는 산야의 넝쿨 식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립(自立)하지 않고, 다른 나무에 기어올라 햇빛을 독차지하여 그 나무를 질식시키는 행위가 밉다. 이렇게 산림을 황폐하게 하는 걸 보고는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등산 길에, 하산 길에 네 산, 내 산 가리지 않고, 칡, 다래, 청머루 등은 보이는 대로 끌어내리고 밑동을 잘랐다. 그러다가 산방 앞산에 몇 그루 이 쥐다래가 사는 법을 보았고 나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날씨가 화창해서 벌이나 나비가 활동하기 좋은 한 낮이 되면 이 의사화의 잎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잘 닦은 은(銀)기물의 흰색을 띈 잎은 가까이서 보아도 5백 미터 쯤 거리에 있는 것으로 멀리 보이고, 5백 미터 쯤 멀리 있어도 50미터 쯤 가까이로 다가와서 보이는 착시(錯視)가 된다. 이렇게 중매쟁이 곤충들을 정신을 쑥 빼놓고 목적을 달성하는 영리함이 엿보인다.

지금은 넝쿨 제거작업을 하다가도 청산에서 하얗게 피는 이 넝쿨은 걷지 않고 계절이 되면 그 아름다움을 즐긴다. 그렇지 않은 것도 있더라고 한다면 그것은 야생 수국일 것이다. 색깔이 보라색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식물들의 그 영리함에 놀란다. 보라색의 이 꽃도 성숙하여 중매쟁이를 받아야 될 무렵이면 꽃 둘레의 의사화(擬似花)잎은 하얗게 변한다. 습지를 좋아하는 이 초본(草本)이 여름의 짙푸름을 배경으로 군락을 이루어 백색으로 만개한 자태는 사람들이 개량하였다는 수국(水菊)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사람들도 있다.

근년에 낸 필자의 졸저(拙著) <빈산엔 노랑꽃 designtimesp=4933>, 그 책 중에 '빈산엔 노랑꽃'이라는 글이 있다. 겨울의 터널에서 벗어나 푸르름이 없는 빈산에 피는 꽃은 모두 노랑꽃이라는 내용이다. 나무로는 생강나무, 산수유의 꽃이 그렇고, 푸새로는 복수초가 눈 속을 헤집고 아름다운 노랑꽃을 피우는 것을 시작으로 애기똥풀, 산괴불주머니 등, 이 시절에 피는 꽃은 모두 노랗다고 썼다. 식물들은 자기 종족의 계승을 위해서는 화분(花粉)매개를 해주는 곤충들의 눈에 쉽게 띄기를 원하고 그 방법을 정확하게 안다.

계절이 만들어내는 배경에 맞춰 황량한 빈산에는 노란색, 잔설(殘雪)과 연초록으로 얼룩지는 초봄에는 진달래, 철쭉, 같이 붉은 꽃을 피우고 지금처럼 여름이 무르녹는 푸른 계절에는 모두 흰색이다. 함박꽃이라고도 하는 작약(芍藥)은 붉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그것은 수입종이고 우리 산야에 자생하는 작약은 그 꽃이 희다.

나는 지금 서재에 앉아 넓지 않은 창문으로 보이는 마당과 앞산, 시야의 정경 만을 쓰고 있다. 거기에서 조물주 하나님이 풀과 나무와 곤충들에게 지시한 삶의 프로그램의 정교함에 감탄하고, 그 지시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저들의 삶을 놀라움으로 보고 있다. 더 넓은 세계에서 피조물들이 수행되고 있을 그분의 의지(意志)를 생각한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