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일기]산촌 사람들

[산방일기]산촌 사람들

[ 산방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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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6월 07일(화) 00:00
이곳에 처음 오던 날이었다. 버스가 서고 사람들이 내렸다. 장을 보고 오는 길이라 손에 든 짐들이 잡다했다. 그때 이미 떠난 버스를 좇아가며 두드려 세우는 아낙네가 있었다. 다시 올라갔다 내려오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삯을 내지 못하고 내려 다시 갔다온 것이었다.

   
이 고장을 지나는 국도를 보수하는 부역에 나도 참여한 일이 있다. 내가 이 일은 국도이니 길을 맡은 당국에서 할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고 동민들에게 설명하는데, 한 젊은이가 벌컥 화를 내며 이 일은 선대 때부터 해온 것이니 우리도 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을 때, 놀란 쪽은 나였다.

울고 들어가 울며 나오는 고장이 삼수갑산이라고 했다. 우리 내외도 이 산촌에 처음 들어왔을 땐 불편함에 울고 외로움에 울었다. 그러나 차츰 이 고장 사람들의 소박한 정감이 도시생활에 찌든 우리에게는 산들바람처럼 느껴졌다.

정은 격식 없는 선물에도 배어있다. 감자밭 옆을 지나다가 "감자가 잘 앉았군요"라고 인사만 해도 한 자루 담아주어 당황한다.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보니 뙤약볕이 드는 뒷마루에 이름도 모르는, 퍽 많은 산나물들이 시들고 있었다. 누가 어떤 연유로 가져왔는지도 모른 채 잘 먹었다.내가 먹어본 나물 중에서 으뜸가는 맛이었다굨일년이나 지났을까. 사람들이 모인데서 그 얘기를 했더니 근처에 사는 한 젊은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기가 갖다놓은 참나물이라는 나물이라고 했다. 치악산 대치봉 바위 밑에서 뜯은 것이라며, 수려한 치악 능선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새파란 하늘, 둥실 뜬 구름, 순간 꿈을 꾸는 듯한 황홀감이 가슴에 일었다.

계절 따라 깨를 털었다며, 땅콩을 캤노라고 당연한 듯이 듬뿍 가져오는 김씨 할머니, 서씨는 가끔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들러 토끼를 두어 마리 잡았노라며 한 마리 놓고 간다. 지난해 추석 때 이웃에 사는 한씨 노파는 제수를 사러 시내에 다녀오면서도 밤은 안 샀다고 한다. 자기네는 없어도 우리집 터에 있는 밤나무가 올밤이라 벌써 영근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웃으로 인정받는 것 같아 무척 흐뭇했다.괭이, 쇠스랑, 삽 따위 농기구나 망치, 톱, 꺾쇠 같은 것은 언제나 밖에 편한 곳에 놓아두고, 다음날 다시 쓸 것은 일하던 자리에 그대로 둔다. 무엇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어느 날 다시 생긴다. 누군가가 필요해서 가져다 쓰고는 제자리에 갖다놓는 것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집을 며칠 비워도 문을 잠그지 않는다. 그 집의 개나 닭이 굶으면 누구라도 먹이를 갖다준다. 나도 문을 잠그지 않는다. 때로 돌아와보면 서재에 인기척이 있다. 빈 집에 초면인지라 의아해하면, 수더분한 말씨로 집 모양이 유별나기에 좀 구경하는 중이라며 "책이 많군요" 한다. 이게 참 사람 사는 모습인데, 속으로 생각하며 굳었던 내 표정을 풀고 진정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늘 전주 이씨임을 입에 올리는 이 노인 집앞을 지나려니 마을 사람 몇몇이 둘러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다. 과문불입(過門不入)은 인사가 아니라며 끌어들인다. 이 마을에는 좋은 자연 덕인지 장수하는 노인이 많다. 내 또래는 중년밖에 안 된다.

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것이 내게는 뱀이다. 아내는 뱀이 싫어한다는 백반가루를 주위에다 뿌린다. 이곳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뱀은 허물을 자주 벗는 동물이라 깨끗하다구요" "어디서 봤는지 알려만 주세요. 처치해드릴테니" "발을 쾅쾅 울리면서 걸어보세요. 도망쳐버립니다" "살모사야 독하죠. 그래도 아직 뱀에 물려 죽은 사람은 없어요. 빨리 병원에만 가면 약이 좋으니까요" "이제 익숙해지면 괜찮아요"라고들 한다.

그렇다. 모든게 익숙해져야 이 산촌 사람이 되는 것이다. 풀섶을 기어가는 뱀이 징그럽지 않은 날, 그날이 바로 산촌 사람이 되는 날이다.

내 아호는 초우(草友)이다. 시골 사람으로 자처하며 살고 싶어하는 나에게 B선생이 지어준 이름이다. 흡족했다. 그런데 여기서의 나는 아직도 백면서생(白面書生)이다. 하지만 나도 이제 그들처럼 철 따라 산나물을 뜯고 산열매가 익는 곳과 때를 알아, 쓴 나물 먹고 산과주를 담그며, 팔베개 하고 유유히 사는 날을 즐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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